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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Aug 16. 2024

필명을 짓다가 기억난 나의 첫번째 이름

책에 담길 '이름'을 고민하며

나의 닉네임, 블루문R


블로그 글쓰기 시작할 때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닉네임이다. 는 별 고민 없이, 그냥 그때 떠오른  단어로 닉네임으로 정했다. 바로 '블루문'. 왜 '파란 달'이 떠올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뭔가 멜랑꼴리한 느낌이군 생각했다.

이후 어디선가 검색어에 걸리게 하려면 뒤에 영문자를 붙여주면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 창에 '블루문'을 검색하니, 정말 '파란 보름달'만 계속 나왔다. READ의 R을 '블루문' 뒤에 붙였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만들어진 닉네임으로 인스타그램 주소도 만들고, 브런치 주소도 만들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새로 가입하게 된 이곳저곳 단톡방에서 사용하는 닉네임도 '블루문R'이다. 이 이름을 이렇게 많이 사용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끔, 처음부터 좀 고민을 하고 나의 정체성을 담거나, 나의 지향을 담은 닉네임을 골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이름이면 어때. 글만 쓰면 되지. 누가 안다고.' 하며 넘어가곤 했다.



종이책에 들어갈 '이름'은 어떻게?


종이책을 만들게 되니 이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해야 하게 되었다.  

내 진짜 이름이 책에 담겨도 괜찮을 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인쇄되어 새겨질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10명의 초보작가들과 함께 하는 공저를 쓰고 있다. 초고를 쓸 때부터 나는 이 책에 내 본명을 넣지 않을 것이라 작정했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랐다. 내가 하는 구체적인 직업과 지난 나의 삶이 섞여 내 글이 다르게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 사회적 역할에서 나는 빠지고 개인으로써 나만이 보이길 원했다.  


앤 롤링은 '큰 소란이나 기대 없이 새로 시작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었다'면서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범죄소설 "뻐꾸기의 외침"을 썼다. 물론 내가 조앤 롤링처럼 유명해질 턱이 없지만, 혹시라도 내가 책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단 말이야?"하지 않게 되었으면 했다. '해리포터를 쓴 사람이 범죄소설을 썼단 말이야?' 하는 반응 자체가 싫었을 조앤 롤링처럼 말이다.  


공저가 마무리를 향해 가면서 작가 프로필을 써야 하는 시기가 왔다. 필명을 결정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필명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때, 아이에게 물었다.

(나는 종종 큰 아이에게 내 고민 거리를 묻는다. 시원하고 통찰 담긴 답을 자주 듣기 때문에.)


"엄마 필명을 뭐로 하면 좋을까? 공저 책 프로필에 넣어야 해"


아이가 단숨에 얘기한다.

"희경, 어때?"


깜짝 놀랐다. '희경'은 나의 첫 번째 이름이다. 지금 내 이름은  개명한 것이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 나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게다가 나의 필명으로 이 이름을 떠올려주다니. 뭉클했다.



@ Unsplash의 Ainur Iman



버려진 나의 첫 이름, '희경'


내 기억 속에 모든 순간 나의 이름은 지금의 이름인 00으로 불렸다. 외할머니만 제외하고. 외할머니는 나를 줄곧 나를 '희경'으로 부르셨다. 내 이름을 헷갈려하시나 보했다.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왜 내 이름을 이상하게 말하는 것인지'를 물어보고 나서야, 내 첫 번째 이름이 '희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전해 준, 내 이름이 바뀐 이유는 이렇다. 바로 밑에 동생이 태어난 후, 부모님은 동생의 이름을 짓기 위해 작명소에 갔다. 그런데 작명가가 큰 아이 이름이 좋지 않으니 동생 이름 짓는 김에 같이 바꾸라고 했단다. 작명가가 돈을 벌려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평생 사용할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면 걱정되고 불안해지는 법. 그래서 부모님은 내 이름을 00으로 바꾸었다.

동생이 연년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내 이름은 00이었다.

집에서는 당연히 나를 00으로 불렀는데, 신기한 것은 학교에서도 나를 00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법적 개명이 너무 어려워서 나의 주민등록상 이름은 여전히 '희경'이었기 때문에 입학은 '희경'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1학년 출석부의 이름은 '희경'이었었다. 이 사실을 안 엄마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선생님을 만났다. 그러면 선생님도, 아이들도 나를 00으로 불렀다. 고등학교 때 즈음 관련 법이 생기자마자 엄마는 신속하게 주민등록상 이름도 00으로 바꿨다. 내 주민등록을 보면 성은 한자인데, 이름 00은 한글로 되어 있다. 절차상 한글 이름이라고 하면 개명이 쉬웠던 것 같다.

이렇게 적극적이었던 엄마의 모습을 돌이켜보니, 작명가가 아주 불길한 말을 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글로만 보이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나의 첫 이름 '희경'은, 나의 사회적 역할이 한 번도 담긴 적 없으니, 글로만 보이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 너무나도 잘 연결된다. '희경'이라는 이름으로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희경'은 내가 그 서사를 쌓아가면 되는 이름이며, 나를 예뻐하셨던 외할머니의 사랑만이 담긴 이름이다.

글을 쓸 때만은, 모범생으로 학생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살아온 나의 본명 00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현생에서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두 아이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둘째 아이는 관심 없으니 실제로 아는 것은 큰 아이 한 명뿐이다.)

엄마가 글을 쓰는 것을 응원하는 아이 덕에 잊었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공저 책의 저자명으로는 이 이름, '희경'을 인쇄하려 한다. 성씨마저 떼어내고 이름만 남길 것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시작을 '희경'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이름 안에 내 글을 쌓아가고 싶다.


나도 안다. 글이라는 것이 글로만 읽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글을 읽으면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게 된다. 저자의 삶을 알면 글이 다르게 읽힌다.

종국에는 나의 글에도 지금은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삶의 일부분이 담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글이 나의 삶을 통해 읽히길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글 속에서만이라도 본명 00이 아닌 '희경'으로 살아보고 싶다. 은희경, 노희경 같은 멋진 작가들과 비슷한 이름이니 더 의미 있지 않은가.



표지 사진: Unsplash의 Amin Has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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