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과학고를 가서 재수를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과학고를 가면, 꼴찌를 해도 중경외시 라인이라고 하더라는 시대적 분위기(이렇게 표현하는게 맞는지는 모르겠다.)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도 꼴찌를 하더라도 버텨 보자는 식의 마인드가 강했었는데
실제로 꼴찌를 해보니 중경외시도 못가는 상황이 왔다.
당시, 추가합격자 선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대학을 갈 수 있는 상황이였는데 야속하게도 추가합격이 많이 빠지지 않은것은 누구를 탓할 문제도 아니였다.
그래서 재수를 했다. 지금의 과학고는 달라졌다고 알고있지만, 당시 과학고의 커리큘럼은 '수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였다.
과학고라는 것에 대한 편향된 우상화가 나를 객관적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왔는데, 인문계로 전학을 가지?' 라거나 해보지도 않은 '국어,영어공부를 하면서 수능준비를 하는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하위권의 성적으로 점철된 과학고의 성적표를 붙잡고 수시원서의 제도앞에 물을떠놓고 비는 판국이였다.
참 웃기게도, 나의 수능성적은 영어와 국어가 제일 좋고 수학이 제일 낮았으며, 과학고 그리 높은편이 아니였다. 결국 어디가서 '나 과학고 졸업했습니다.'하기엔 난감한 상황이 온것이다. 아무튼, 그런 성적의 수능으로는 과학고에서는 '무슨 그런대학을 가냐.' 의 분류에 속하는 대학을 가게 되었다. 3년간 과학고에서 수학과 과학에 시달린 탓인지 나는 공학, 더 크게는 응용과학의 분야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수학을 너무 하기가 싫었고 수학이 없는 과학을 하기란 여간 어렵다는 생각이였다. 그래서 인문분야의 학문들을 쭉 살펴보다가 내 선택에 들어왔던것들은 사회과학, 국어국문학, 철학, 경영학 정도였는데 여전히 나는 '인문학은 밥벌어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에 국어국문학이나 철학같은 학문은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저잣거리라는 생각으로 선택지에서 지워버렸었다.
솔직히, 경영학도 이공계의 학문에 비해서 전문성이 너무 떨어지고 전공자가 넘쳐나며 심지어 공대출신들이 부전공이나 MBA로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전공에 대한 일종의 회의와 의구심, 불안함을 갖는것은 사실이였다. 그나마 경영학의 틀에서 '밥벌이'를 해볼법한 부분이라면 재무/회계 정도. 즉, 어느정도 숫자와 연관있고 직접 공부하고자 하면 좀 귀찮으며 나름이 방법과 법칙, 방식이 존재하는 분야가 재무회계였다.
대학 1학년은 상경계열로 전과하기 위해서 공대 과목은 최소한으로 이수하고, 전과할 학과의 과목들을 미리 듣기 시작했는데 '대학의 수업이라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를 느끼며 내 선택에 만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경영학의 많은 부분은 재무회계 분야를 제외하고서는 '누가 이런이런 주장을 했다더라, 근데 나름 맞는것 같다.'는 식이였다. 과학에서는 상황과 환경을 통제하고, 불변의 원리와 원칙을 찾아가는것에 반하는 뉘앙스랄까.
어쨋든, 그런 경영학의 서적들과 내용들이 너무 재밌었고, 전공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기에 당연히 시험을 보면 성적도 꽤 잘나왔다. 어떻게 보면, 과학고에서 바닥을 기던 내 성적을 보면서 깊은 좌절과 고민에 빠졌기에 대학에 와서 하고싶은 공부를 즐겁게 하면서 그 결과 마저도 좋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