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한 지 15년 만에 두 딸과 친정으로
한반도 남쪽 끝 바닷가 작은 읍내에 살고 계신 부모님을 떠나 살아온 지 어느 새 30여년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은 뒤 전업 주부가 되었다. 이후 둘째가 생기고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적응하며 살아왔다.
부모님은 40여년 교직 생활을 마치신 후 역시 고향을 떠나 맞벌이를 하는 동생의 두 아이를 돌보시며 주말이면 고향으로 내려가시는 생활을 8년째 해오셨다. 팬데믹을 지나며 왕래하는 횟수가 점점 적어지더니 이젠 두 분의 생신에도 전화로 안부를 묻고 명절에야 고향에 가는 것으로 합의 아닌 합의가 이루어졌다. 연휴에 맞춰 간신히 하루를 자고 대여섯 시간이 걸려 돌아오는 짧은 만남 뒤에는 늘 허전함과 서운함이 남았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애써 들여다 보려 하지 않으며 수 해를 보냈다. 그러다 올해 동생네가 일년동안 해외 연수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작년 초 동생의 연수 일정이 결정되고 엄마는 부쩍 기분이 나아지신 듯 보였다. 바쁜 아들 며느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8년째 두 손주의 육아를 하시는동안 칠순을 넘기신 엄마는 두 번의 백내장 수술과 세 번의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고 어깨 통증과 불면증이 심해지셨다. 그런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동생네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뭐라 싫은 소리를 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하기 싫었다. 마땅히 도울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잔소리하는 손윗사람이 되기 싫었다.
딸부잣집 외아들에게 시집 오신 엄마는 교사로 정년을 하실 때까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우리 남매를 키우셨다. 오랜 기간 암투병을 하신 할머니가 돌아가신 시점과 겹친 엄마의 갱년기는 심각한 우울증을 동반했고 당시 대학에 다니던 나는 엄마의 힘든 마음을 안아드리기에 많이 어리고 또 이기적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한 후에는 엄마의 방학기간에 맞춰 여행도 가고 쇼핑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지만 그 시간이 이제는 아득하기만 하다.
육아에서 벗어나 고향에 내려가신 엄마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면 괜찮다 하시지만 만나면 늘 그 전보다 많이 쇠하신 모습에 내 마음이 아픈게 싫은 것도 큰 이유다. 아이들이 방학을 한 김에 그리고 설연휴가 길어진 김에 30년만에 고향에서 한달을 살기로 했다.
지난 추석에 고향에 다녀오고 동생네가 떠나기 전 송별회를 겸한 가족식사를 한 이후 두 달만에 다시 만난 부모님은 홀가분해 보이면서도 떠난 식구의 자리를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과 함께 등장한 우리를 맞은 고향집의 조용한 거실이 쓸쓸해 보인 것은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부모님이 은퇴 전에 이사하신 고향집은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 부모님은 그 때에 비해 조금 작아지셨고 아픈 곳이 늘었다.
아침형과 올빼미형으로 생활패턴이 다른 두 분은 고향집에서 각방을 쓰시지만 큰 안방을 우리 세 모녀에게 내어주시고 엄마가 아빠의 침실로 잠시 거처를 옮기셨다. 가끔 통화하고 일년에 두세번 만난게 전부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가우면서도 어색한 두 딸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이제 사춘기에 들어선 큰 딸은 올 겨울 들어 부쩍 말수가 줄었는데 어찌어찌 겨우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직 초등학생인 둘째가 두 분의 심심함을 좀 덜어드리기를 기대해본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