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aidee!
망했다. 라오스에 와서 매일 여명도 채 밝지 않은 새벽에 멀뚱멀뚱 눈이 떠졌었는데, 루앙프라방에서 맞는 마지막 아침에는 피로가 누적됐는지 알람도 듣지 못하고 6시 반까지 곯아떨어져 버렸다. 루앙프라방 일정 중 가장 고대했던 탁발을 못 보다니... 아쉬움에 이리 뒹굴, 자괴감에 저리 뒹굴 한참을 애꿎은 침대만 괴롭히다가 마음을 다잡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앞 뜰에서 산책을 하며 풍경을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굿바이 인사를 하고 조식을 먹으러 나갔다. 숙소 조식 중에 가장 맛있었던 크로와상에 버터와 이름 모를 과일잼을 발라 마지막 조식으로 먹었다.
이대로 체크아웃을 하기엔 너무 아쉬워 숙소 자전거를 빌려 남칸강과 메콩강이 만나는 뷰포인트까지 라이딩을 떠났다. 힘차게 페달을 저어 몇 번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해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자전거를 잠시 공터에 세워두고 오솔길을 지나 강변까지 걸어내려 갔다. 파노라마를 늘어놓은 듯 탁 트인 전경에 맥을 놓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동안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바람이 제법 시원해 따가운 아침볕 아래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삐질삐질 새어 나온 땀을 식혀주었다. 한 길 물 속도 알 수 없는 걸쭉한 강물 위로 유람선이 유유히 지나갔다. 유람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람객에게 하는 인사인지, 루앙프라방에게 하는 인사인지는 손을 세차게 흔들고 있는 나조차도 모르게...
숙소를 돌아가는 길에 강 건너 풍경이 예쁘게 보이는 공터가 있어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또 멈춰 섰다. 병풍처럼 멋진 강 건너 풍경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필름에 남기고 싶어 카메라를 감자씨에게 넘겨주고 사진을 부탁했다. 바로 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동하느라 카메라 전원을 끈 상태로 넘겨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나는 카메라에 잘 잡히기 위해 천천히, 그리고 비틀비틀 사력을 다해 자전거를 몰며 마냥 포즈만 취하고 있었고, 감자씨는 카메라 조작에 서툴렀다. 셔터를 눌러봐도 찰칵 소리를 내며 찍히지 않자, 의아함에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다가 카메라 뒷덮개 버튼을 눌러 열어버린 것이다... 그걸 본 순간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억겁의 시간 같던 몇 초 동안 경악하여 잠시 모든 동작을 멈췄다가 정신을 차리고 성난 코뿔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달려갔다. 필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 황망함을 알 것이다. 사용 중인 필름이 빛에 노출되면 타버린다.
힘들게 오르막길을 올라 찍었던 강변의 전경, 어제 꽝시폭포에서 찍었던 풍경들이 눈앞에 필름처럼 되감아 펼쳐졌다. 그것들이 다 한 줌 재로 날아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상황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찔끔 났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감자씨의 고의가 아닌 실수이고, 애초에 내가 카메라 전원을 켜지 않고 준 것이니 탓하거나 화내지 않아야겠다 다짐하면서도 타버린 필름이 안타깝고, 어디까지 타버렸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필름사건을 겪고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콧김을 뿜으며 급속도로 말수가 줄어든 나로 인해 감자씨는 머쓱해졌고, 어색해진 상태로 숙소에 돌아왔다. 체크아웃하기 전 먼저 사과를 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필름이 얼마나 탔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은 감자씨의 여행기간 동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내색을 안 하려고 노력했지만, (감자씨의 말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다. 코에서 불을 뿜었다고...) 사진에 대한 애착이 큰 나는 속이 많이 상했다.
여행이 끝난 후 재빨리 필름 현상을 맡겼다. 현상을 기다리는데 그토록 떨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필름 첫 롤, 필카를 들고 떠난 첫 여행의 필름도 그렇게 긴장되지 않았다. 얼마나 타버렸을지 모를 필름을 걱정하며 내 마음도 까맣게 타 오그라들어갔다. 얼마 후 받아본 대망의 필름사건의 사진파일은 나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내 눈에는 뒷덮개가 열린 것이 억겁의 시간처럼 보였는데, 감자씨가 순식간에 재빠르게 닫았는지 다행히 필름은 세장 정도밖에 타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가쪽이 타버린 사진이 실제로 내 눈으로 본 실경보다 더욱 멋지게 풍경을 그려내기도 했다. 일부러 의도하여 효과를 주더라도 이렇게 감각적인 색감을 잡긴 어렵게다 싶을 정도로. 이 사진을 본 순간 머릿속으로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동전이 지니는 가치는 어느 면에서나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마음의 각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액운 같았던 사건도 내가 어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시없을 기적과 추억일 수도 있다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라오스 여행 브런치북의 멋진 표지 사진을 남겨준 카메라에 서툰 감자씨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