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aidee!
역까지 가기 전 시간이 조금 떠서 카페를 한 군데 들렀다 갈까 싶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길에 역으로 떠나는 조인밴을 만나 바로 올라탔다. 밴은 처음 보는 길을 달려 낯선 골목골목으로 들어가서 어떤 집으로 가더니 한 무리의 가족을 태웠다. 서양인 할아버지와 동양인 할머니, 그들을 조금씩 나눠닮은 딸들, 그리고 아기새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삐약삐약 거리는 손주들과 함께 시끌벅쩍하게 역으로 향했다.
루앙프라방역에 도착해서 여권과 짐 검사를 하고 들어왔다. 카페를 가지 않고 바로 왔기 때문에 카페인이 당겨서 역 안에 있는 다오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샀다. 카페 안을 둘러보니 원두도 싸고 라오스에서 유명한 커피라길래 먹어보고 맛있으면 원두를 사갈까 했는데 맛이 그냥저냥 저가 커피 맛이라 그냥 한잔 맛본 걸로 충분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시간이 남아 애꿎은 빨대를 휘적휘적 홀로 남은 얼음을 괴롭히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출발시간이 다가왔다.
지난번 실패의 경험을 스승 삼아 재빠르게 입장 대기줄을 섰다. 기차에는 캐리어를 보관하는 공간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여유를 부렸다가는 또 28인치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머리 위 선반으로 올려야 하는 참사가 일어나고야 만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겠지만 이번엔 기필코 캐리어 보관칸을 차지하고야 만다는 결연한 의지를 혼자 속으로 다졌다. 대기줄에 서있다가 시간이 되니 여권을 보여주고 플랫폼으로 통과를 했고, 플랫폼 안에 재빠르게 들어가서 내가 타야 할 열차칸의 맨 앞줄을 선점했다. 됐다. 이제 열차칸에 올라 캐리어만 실으면 되는 것이다.
몰려드는 안도감에 맥을 놓고 있던 것도 잠시, 옆줄에서 단체 관광을 온 어느 국적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해서 잠시 정신이 소란스러워졌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위해 편의상 그들을 노사바이(No sabiee)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루앙프라방에 대한 기억과 풍경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있는 나에게 방해가 되긴 했지만, '아무렴 어때. 난 이렇게 제일 먼저 기다렸으니 캐리어만 놓으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마침내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치익치익 마찰하는 소리를 내며 열차가 서서히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그 순간이었다. 대열이 순식간에 어긋나더니 몇십 분을 줄을 선 게 무색하게 노사바이들이 막무가내로 입구로 몰려들었다. 사실 좌석도 이미 정해져 있으니 타는 순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대기할 때부터 1번으로 줄을 서 얻으려 했던 28인치 캐리어를 놓을 칸은 도저히 눈 뜨고 양보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리고 이곳에 와서 사바이를 주구장창 외치는 나라면 그냥 멀찍이 서서 '그래 먼저 가라, 뭐가 저리 급하누' 했겠지만... 이 순간만은 사바이는 잠시 내려두었다. 그리고 잠시 고이 접어 넣었다. 28인치 캐리어를 짊어지지 않는 게 지금 이 순간 나에겐 가장 큰 사바이기 때문이다.
염치를 모르고 새치기하여 끼어드는 노사바이들에게 분노의 어깨빵을 날리며 수비해 보았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몇 명은 이미 장벽처럼 줄지어 내가 예약한 열차칸으로 오르고 있었다. 분노 버튼이 제대로 눌린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느꼈다. 25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한 손으로 번쩍 들고 비어있는 옆 열차칸 입구로 뛰어올라 내 열차칸으로 뛰어넘어갔다. 체면과 사바이를 버렸지만 캐리어 보관대를 선점할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사바이는 다른 게 아니다. 내가 줄 서서 얻어낸 칸에 28인치 캐리어를 집어넣고 편하게 가는 게 사바이다..
자리를 찾는 동안에도 노사바이들이 통로에 있는 사람을 밀어대는 통에 줄이 한참 막히고 밀쳐진 서양인 할머니가 화를 냈다. 자리를 찾아 앉고도 화가 삭히지 않은 할머니께서 옆에 앉은 점잖아 보이는 노사바이에게 저들이 갑자기 마구 밀었다고 하니 그분이 하는 말이 또한 가관이었다. 사람이 많으니 파이트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서바이브 한다라고 설명을 하더라... 아니 무슨 기차 좌석이 마트 타임세일도 아니고, 줄 선대로 입장해서 착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또 사바이가 연기처럼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분노가 피어올랐지만 가까스로 고이 넣어둔 사바이를 꺼내 들고 자리에 앉았다.
기차 좌석마다 있는 콘센트에 충전기를 연결해 많이 닳아버린 핸드폰을 충전했다. 그리고 핸드폰 배터리보다 더 닳아버린 나의 사바이는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으로 충전했다. 그렇게 기차는 비엔티안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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