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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ajera 비아헤라 Jun 24. 2024

[치앙마이 여행] 지구와 달

Sabai Sabai

   한 달 살기의 성지 치앙마이로 떠난 것은 예정된 충동이었다. 여행지로서의 치앙마이는 나에게 로망의 대상이었다. 김해에서 가는 직항이 없어 더 멀게 느껴지고 애가 탔다. 문득 항공 어플에 들어가 치앙마이를 검색하니 전에 없던 직항이 떴다. 출발지를 인천으로 잘못 조회했나 싶어 다시 첫 화면으로 돌아가 김해, 치앙마이를 꾹꾹 눌러 조회했다. 여전히 노선이 떴다. 직항 항공편이 신설된 것이다. 나는 또 애가 달았다. 언제 직항 편이 사라질지 모르니 신설이 됐을 때 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음 같아선 한 달 살기로 머물고 싶었지만, 한 달은 고사하고 2주 일정도 어려운 현실이 내 발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후일이 심히 걱정되긴 했지만 흐린 눈을 하고 7박 8일로 일정을 잡았다.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반짝반짝 빛나는 네모반듯한 도시의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아 드디어 내가 치앙마이에 왔구나, 저 아래 정사각형이 사진으로만 보던 올드시티네. 2km라더니 내려다보니 엄청 크네. 숙소가 올드타운인데 여기서 톡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짐칸에 있는 짐을 꺼내고 줄 서서 내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으로 돌리며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제탑의 대기신호를 받고 비행기는 여전히 올드시티 상공만 그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두 바퀴쯤 돌 때는 야경 관람을 시켜주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각도로 구경을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그게 다섯 바퀴, 열 바퀴가 되자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대고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기내방송으로 활주로에 이상이 생겨 관제탑에서 ok 사인을 보낼 때까지 착륙할 수 없다는 안내와 함께 우리는 치앙마이 상공을 무한대로 돌기 시작했다. 한 삼십 분쯤 그렇게 치앙마이를 지구인양 축으로 놓고 우리는 달처럼 다 같이 공전을 했다. 언제쯤 지구와 가까워질까 하는 달의 마음으로 착륙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비행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 근처 공항에 비상착륙하겠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치앙마이를 코앞에 두고 그렇게 아득히 멀어졌다.

  또 한참을 달려 비엔티안이라는 공항에 도착했다. 비엔티안이 어딘지 너무 궁금해서 검색해보고 싶었지만, 한국유심도, 태국유심도 터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황당한 와중에 승무원에게 여기가 무슨 국가냐 물어보기도 지쳐서 비행기 급유하는 광경만 황망히 지켜봤다. 이제 다시 돌아가나 싶었는데, 비상착륙이라도 예정 없이 입국을 한 거라 공항 측에서 항공사에게 입출국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해서 또 한참을 기다렸다. 이미 인내심이 진즉 바닥난 사람들은 무슨 서류를 또 쓰냐고 큰소리로가 나고 술렁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기내에서 소동이 일어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서류를 만들어서 오는지 공항 직원은 한참 후에 돌아와 서류를 처리했다. 다시 빌어먹을 비행이 시작되었다. 4시간 소요예정이었는데 어느새 7시간째 비행기에 억류되어 있다. 다행히 치앙마이 공항의 문제는 해결되었는지 착륙할 수 있었지만 자정 넘어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어 땅을 밟았다.

  늦은 시간이라 환전소는 물론이고 택시부스를 제외한 모든 곳이 셔터가 굳게 내려 닫혀 있었다. 한화보다는 달러가, 달러 중에는 큰 단위 화폐가 가장 환율이 좋다고 해서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환전할 요량으로 100달러짜리 지폐만 가지고 왔는데, 택시는 카드나 달러는 안 받는다고 했다. 서둘러 트래블카드에 환전을 해서 ATM기와 낑낑거리며 씨름을 하다가 바트를 손에 얻었다. 1,000바트를 당당히 손에 들고 택시부스로 가 "고 올드타운!"을 외쳤다. 땀 냄새가 가득한 택시에 배정이 되었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친절히 캐리어를 실어주었다. 그래서 땡큐를 외치고 뒷좌석에 올라타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1시가 넘어서 내가 예약한 자그마한 호텔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리셉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더 가관인건 호텔 옆 건물 앞에 앉아서 졸고 있던 노숙자가 내가 짐 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에서 안 내릴 수도 없고 숙소를 들어갈 수도 없어 갈팡질팡 택시아저씨만 애타게 쳐다보다가 결국 굳게 마음을 먹고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숙소 쪽으로 들어가서 객실 문이 열려있는지 보려 했지만, 난 내 숙소가 몇 호인지 모른다... 결국 구글맵을 열어 미친 듯이 인근 숙소를 검색했다. 정말 다행히도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호텔이 아직 운영하고 있었다. 끌기에도 무거운 캐리어를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들고 노숙자를 한껏 경계하며 거의 뛰듯이 옆 건물로 갔다. 다행히 노숙자 선생님은 시선만 줄 뿐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겁에 질린 나에게는 음흉한 눈빛으로 느껴졌지만, 그저 잠을 방해한 훼방꾼을 경계하는 눈초리였나 보다. 옆 호텔 리셉션 직원을 보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손짓발짓을 하며 내가 예약한 호텔이 닫혔다고 짧은 영어로 떠듬떠듬 황당함을 쏟아냈지만 그는 얼굴에 어색한 영업용 미소를 띠며 물끄러미 쳐다만 볼뿐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소연을 포기하고 남는 방이 있는지 물어봤다. 다행히 천운이 따르는지 마침 방이 딱 하나만 비었다고, 그런데 트윈베드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예스! 오브콜스! 땡큐!"를 외치고 2시가 넘어 체크인을 했다.

  네 칸 벽이 있고 천장이 있고 몸은 하나지만 침대가 두 개나 있는 이 상황이 갑자기 너무나도 감사했다. 정해진 공항에 착륙할 수 있음에, 예약한 호텔도 아니고 1박 숙박비가 더 들었지만 어찌 됐든 안전하게 체크인할 수 있음에 감사해하며 늦은 샤워를 하고 두 개 중 하나의 침대에 누웠다. 평소라면 건들지도 않았을 호텔 냉장고 안 맥주를 한 캔을 따 마시며 오늘 하루를 되새김질해 봤다.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무섭고 짜증 나는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계획대로만 된다면 무슨 재미겠어? 이런 게 진정한 여행의 묘미지’하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이내 깊은 잠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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