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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연이 뿌린 씨앗>

- 나의 음악 선생님, 미술 선생님, 무용 선생님, 체육 선생님

by 김현정

가곡 '봄처녀'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날, 그날의 강렬함은 평생일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갓 입학한 3월 음악 시간, 아주 못생긴 남자 한 분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검정 연례복을 입었는 것 같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모습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른 복장이었다. 앞서 세계사에서 인류의 기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배웠는데, 흡사 그 모습과 닮았다.

선생님은 칠판 한가운데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노래를 한 곡 하겠다고 하시고, 피아노 앞에 성큼 걸어갔다. 피아노를 치면서 '봄처녀'를 부르시는데, 나는 그 아름다운 가락과 노랫말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선생님이 너무 좋고, 선생님의 외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난생처음 들은 그 가곡의 맛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어 봄이 되면 '봄처녀'부터 듣는다. 그 음악 선생님의 성함을 기억하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살았었다. 그 음악 선생님의 목소리, 그날을 다시 듣고 싶었다.



중학교는 걸어서 한참 거의 1시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였었다. 버스를 탈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걸을 때도 많았다. 고등학교는 걸을 수는 없는 꼭 버스를 타야 하는 곳이었다. 여학교는 아주 명문 고등학교였었다. 운 좋게 내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험제가 없어지고 추첨제로 바뀌어졌는데, 나는 그 명문학교의 여학생이 되었다.


첫 미술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잘생긴 하얀 얼굴의 키가 커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유화를 1년 하신다고 설명을 하셨다. 선생님이 그린, 내 기억에 말라비틀어진 물고기였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는 명태(아니면 고등어)로 남아 있다. 그 그림이 멋져 보였고, 그런 그림을 그린 선생님도 멋져 보였다.


나는 중학교에서 수채화는 공부했지만 유화는 처음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시내에 있는 미술상에 가서 유화 재료들을 샀었다. 캔버스, 붓, 유화물감이었던 것 같다.

그다음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캔버스에 초벌칠을 한 것 같다. 한결같이 친구들은 밝은 색으로 바탕을 칠했었다. 나는 뭘 잘못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나는 화병 위에 꽂힌 아주 빨간 장미꽃을 그렸다. 유화가 재미있었다. 수채화처럼 조심해서 하지 않아도 되었고 잘못하면 덧칠을 잘하니 뭔가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장미꽃을 잘 묘사하기 위해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색을 입히고 덧칠하고 붓놀림도 재미가 있었다. 화병에 꽂혀 있는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학생들의 작품을 살피면서 지나가시던 선생님이 내 작품을 유심히 보시고는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면서 이번 문예 예술제 때, 전시를 하면 좋겠다고 말씀을 해주셨다. 훌륭한 화가이신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셔서 나는 마음이 부풀었다. 그러나 나의 손기술은 거기까지였다. 화병을 잘 묘사하지 못했다. 화병이 화병답게 사실적으로 나와야 하는데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고 평면적이 되었다. 그에 비해 탐스러운 장미꽃은 입체감이 있었다. 문예제에는 전시되지 못했다. 나는 그냥 그 그림을 집에 방치했었다.


나중에 9살이나 어린 내 여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 그림을 학교에 갖고 가서 미화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11살 차이가 나는 막내 여동생이 그 그림을 학교에 들고 가서 내 그림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혼하고 난 후에도 그 그림을 난 방치 했지만 잊고 살았지만 내 두 여동생이 언니의 그림을 아껴주다가 일어난 일이어서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미술을 좋아하고 배우러 다니면서 내가 그린 그 그림을 내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방치한 나의 무심함에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 그림이 내 기억에는 있다. 그러나 그때 그린 내 최초의 유화 그림이 내 눈앞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보고 싶다.



무용선생님은 엄하셨다. 한국 무용을 전공하셨다. 꼭두각시춤을 추었다. 머리에 족두리를 하고 짧은 저고리와 짧은 한복을 입고 춤을 추었다. 때로는 부채춤도 추었다. 손동작, 발 동작 하나하나 엄하셨었다. 한국 무용이 즐겁지는 않았다. 음악이 어렵고 내 정서와는 맞지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그래서 춤을 좋아하나 싶다.


참으로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다.


지금의 내 화요일 라인 댄스 선생님이 두 번째 수업을 한 후에, 선생님이 하는 라인댄스 모임에 16명이 있는데 춤을 함께 추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라인댄스를 하는데 선생님이 선생님들끼리 하는 취미 라인댄스 모임에서 하는 국제대회에 함께 출전하자고 하셔서 어안이 벙벙했었다. 선생님과 그날 이후, 세 번째 수업을 마친 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제가 고등학교 때, 무용선생님과 너무 닮아서 놀랐어요. 얼굴 모습, 머리 모양, 분위기가 좀 닮아서 더 좋았어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나는 나의 고등학교 때 무용 선생님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을 가르친 무용 선생님은 무용 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한 분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취미로 라인댄스를 열심히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다. 나와 함께 하자던 그 취미 모임에 나오신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시작했고, 나의 발목, 무릎에 관절염이 있어서 열심히 해야 하는 그 모임에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선생님께 나의 건강하지 못한 관절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다. 나를 좋게 봐주신 선생님이 감사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체육 선생님은 나이가 많으셨다. 머리가 희끗하셨고 나이가 들어 보였다. 체육시간에 뛰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평균대를 했었다. 높지는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높이였는 것 같다. 평균대 위에 올라가서 발을 발레리나처럼 발끝을 예쁘게 하라고 하셨다. 힘들었지만 뭔가 재미가 있었다. 선을 예쁘게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체육 시간에 이런 것을 배우는 게 이상했었다.


명문 있는 여학교는 달랐다는 그런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나의 취향인 가곡을 좋아하는 것, 아름다운 낭만적인 팝송을 좋아하는 것, 발레를 좋아하는 것, 춤을 좋아하는 것, 미술을 좋아하는 것, 이런 예술적인 아름다운 매력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께 감사하다.




사람의 인연은 씨앗으로 오는 가 보다.

그 시절 나는 행복한 씨앗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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