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한 점집을 하나 찾았어요.” 오래전 직장 후배와 나누던 대화에서 불식간에 튀어나온 그의 말 한마디였다. 사람과 세상을 대할 때 적당한 냉소와 따뜻한 인간미를 좌우 날개처럼 달고 있던 그였기에, 미래를 예언해주는 서비스에 솔깃해하는 그의 표정이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뭐래?” 심드렁한 내 질문에 흐릿한 미소만 짓던 후배의 표정이 정작 역술가의 표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가 살아가며 어떤 것이 답답했는지, 성큼 다가오는 미래의 불확실성이 그의 불안을 어떻게 키워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으나 불가피하게 맞이할 현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우리 삶의 관행일지 모른다. 이미 정해져있는 운명의 궤적을 확인하는 대신 우리가 용기 내어 할 수 있는 일들은 정말 없는 것인가.
대입 시험을 앞두었던 시절 모두들 교실에 떠다니는 먼지마저 예민하게 여기던 시기, 나는 소설책을 끼고 살았었다. 겉으로 보기에 늘 책상 앞이나 도서관에만 처박혀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모범생의 외향이었다. 하지만, 내 가방 속에는 수험교재 대신 최인호나 모파상, 발자크의 소설들이 들어있었다. 그 누구도 내가 “인생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고3 시절을 소설책과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가 자칭 고급스러운 일탈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린 것은 가방 속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때문이었다. 시험을 몇 달 앞둔 수험생의 가방에서 유부녀에 빠진 청년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니, 부모님에겐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혼쭐이 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내가 재수를 결정한 뒤에야 깨달은 바가 하나 있었다. 그건 어차피 공부는 인생에서 피해갈 수 있는 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배우고 익히는 것’에 대해 세월이 조금 더 흐른 뒤 들었던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공부에는 항상 때가 있다’는 앞선 세대의 암묵적 철학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해마다 두 차례 치러지는 검정고시 이후에는 늘 그렇듯 신문에 자그마한 기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전쟁과 가난으로 얻지 못한 학업과 학력을 만학으로 이루어낸 노인 분들의 이야기이다. 이 열정적인 분들에게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합리적인 명제일 수는 없다. 다만, 그 분들의 열정 이면에는 이 시대의 ‘학력’이 가진 기묘한 가치관도 함께 배어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것은 배움에 대한 갈망 이전에 어디까지 졸업했는지를 캐묻는 우리 사회의 만연한 무례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만학으로 얻어낸 졸업자격에 기꺼운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감내해야 했던 근원적 차별에는 위로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국 청대의 서화가이자, 전각 예술가인 조지겸은 평생 벼슬에 오르고자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를 거듭했다. 어린 딸의 요절과 아내의 병사, 평생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 가난의 불운이 그의 인생을 집어 삼켰다. 그러나 조지겸의 인생을 꽃 피운 계기는 우연히 접하게 된 서예와 전각예술을 공부하면서였다. 숨어있던 그의 재능이 그 과정에서 비온 뒤 연꽃처럼 만개했던 것이다. 죽어서 관을 살 돈 조차 남기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곤궁한 삶이었으나, 그의 서예작품은 지금에 이르러 보물이 되었고, 그의 전각 예술은 청대의 정상에 올랐다는 평을 받는다.
장정일 작가는 저서 [장정일의 공부]의 서문에서 공부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
- 장정일, [장정일의 공부] 서문 중, 2015. 알에이치코리아
작가는 이 서문의 앞쪽에서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라고 언급한다.
무지를 자각하는 일, 그리고 알고 싶은 욕구를 바탕으로 삶을 새롭게 채워가는 일. 새삼 깨닫는 공부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다. 그래야 푼돈을 쥐어주고 들은 역술가의 이야기를 곱씹다 몰려오는 허허로움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재능이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은희경 작가의 표현대로 ‘생각하는 쪽으로 삶은 스며’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