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밤 산책 10화

참을 수 없는 삶의 모순

by 현율


양귀자 작가의 장편소설 <모순>은 1998년 출간 이후 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두터운 독자층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최근 젊은 여성 독자층이 두드러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등장인물의 서사, 묘사들과 더불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작품의 제목 ‘모순’은 작가 스스로도 고민을 했다고 작가노트에 적었을 정도로 함축적이면서도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 실제로 소설 곳곳에서 삶의 이중적 형태와 더불어 행복과 불행의 대비를 발견한다. 화자는 성장하면서 가족과 친척 사이에서 가난과 부의 극단을 체감하고, 혈육의 폭력과 연민을 동시에 경험한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p.229, 2판 188쇄 도서출판 쓰다)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언급할 때는 왜 소설의 제목이 ‘모순’이어야 하는지 공감하게 된다.


소설 ‘모순’은 오랜 기간 읽혀온 덕에 다양한 해석과 감상들이 존재한다. 특히 재미있는 해석들은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 안진진의 마지막 결혼에 대한 선택을 바라보는 시각들이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으나, 주인공이 이해하고 깨닫게 된 사랑에 대한 정의와 결혼에 대한 여성의 ‘현실적 선택’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눈에 띈다. 그리고 그 해석들은 소설이 첫 출간된 후 27년여 동안 시대와 가치관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보여주곤 한다. 특히 작가의 최초 의도와 상관없이, 지금의 젊은 독자들은 자유롭고 분방하게 이를 해석하고 수용하기도 한다.


조금만 과장하자면 80년대 상당수 젊은 독자들은 밀란 쿤데라움베르토 에코에 경도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들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적 양식을 보유했음을 의미하는 숨겨진 거만함이 당시 세대의 가난한 자산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저항에 대한 자양분으로 (미약하나마) 작용하기도 했으니, 이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쿤데라나 에코가 상대적으로 소수의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어진 세대의 문화 자체로 자리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음악이 지배하던 18세기의 ‘엄중한’ 음악 주류를 모차르트가 걷어냈듯이, 하루키의 작품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재치있고 흥미로운 소설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기도 했다. 시기를 특정하긴 어려우나 당시 젊은 독자층을 중심으로 하루키를 이미 읽은 독자와 읽게 될 미래의 독자만 있다는 농담이 기억난다. 하루키 속의 재즈와 미국식(?) 문화는 이문열과 밀란 쿤데라를 이을 그야말로 ‘쿨한’ 대체재였다. 하지만 당시 쿤데라와 하루키를 문화 자체로 소비하던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정작 한국 현대 문학의 뿌리에는 박경리와 박완서, 양귀자 등도 있었다는 것을. 얼마든지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문단이나 미디어는 그들에게 “여류소설가”라는 타이틀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고, 그들의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재제작할 때는 작품성보다는 대중성에 가치 비중을 높이 두곤 했다. ‘여류’라는 타이틀이 붙은 작가들은 시인 고정희의 표현대로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고정희, ‘더 먼저 더 오래’ 중,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페소아는 문학을 ‘사유로 채색된 회화’ 또는 ‘현실의 결함을 배제하고 재현된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자신에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도달할 만한 목표’라고 했다. 저자가 덧붙인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p.64, 봄날의책)


모든 작가에게 있어 결코 단조롭지 않은, 강물처럼 흘러온 문학적 결실은 버티고 무조건 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위에 언급한 ‘여류’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던 작가들의 육중한 작품들의 무게는 한국 현대 문학사가 영원히 갚지 못할 부채로 안고 가야할 판이다.


누군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문단은 여성작가가 대세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천재적인 작품 하나를 남기는 것보다 긴 세월에 걸친 지난하고 고된 작업의 결과물이 주는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강물 같은 한국 근현대사에 흐르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 구조, 삶을 통틀어 가족 안에서 겪는 행복과 불운의 이면들을 바라보는 시선들, 이들은 문학의 모든 영역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발걸음을 이어왔다.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로 알려진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로 불리곤 했다. 이 별칭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흔히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문단의 평가나 기록적인 판매량들을 모두 떠나서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모두 이런 별칭을 기꺼워했을까?


시간은 변화하며 흐르고, 변화하는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조리에 질문을 던지고, 바다를 만날 강물은 다시 곧고 넓게 흐르게 마련이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 양귀자, [모순] p.173, 도서출판 쓰다


‘마치 원고지를 만난 창작욕의 분출 같은, 화끈한 쾌감으로 손을 떨며 그녀는 단숨에 백지를 메워갔다.’

- 박완서,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p.111,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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