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힘든 해였다. 새로 옮긴 직장은 힘들었고, 4월엔 엄마가 돌아가셨다. 상실감과 분노로 가득 찼다. 그래도 우걱우걱 하루를 살았다. 저녁이면 약수터에도 꾸준히 다녀왔다. 홍이가 산에 살 때 마시던 물을 주고 싶어서다. 온갖 분노, 시름, 슬픔이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왔지만, 자연이 주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기대었다. 그해 여름엔 카눈이라는 태풍이 왔다. 이례적으로 육지를 통해 북상해 한반도에 큰 피해를 남겼다. 불암산이 들썩이게 바람이 불고, 어마어마한 비를 쏟아내고 지나갔다.
다시 차분한 일상이 이어지자 물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오가는 길목에서 한 여자가 오도가도 못하고 서있었다. 작은 강아지가 나무 밑에서 고집을 부리고 있나, 생각했다. 막 지나치려는데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그렇다면 어미없이 버려진 것일까? 또 내 눈 앞에서? 얼핏보니 상자로 만든 고양이 임시거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커다란 우산도 씌워져 있었다. 그 여자분이 신경 써 주시는 모양이라 얼른 집으로 왔다.
다음 날 다시 가보니 혼자 있던 그 고양이가 나한테 다가오며 다짜고짜 다리에 몸을 비볐다. 홍이가 하던 짓인데,하며 큰일났다 싶었다. 발랄하게 꼬리를 수직으로 세우고 예쁘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깨끗하고 예쁜 고양이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참 이상했다. 그곳은 고양이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며, 초등학교 담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불암산엔 아기고양이 천적들이 많다. 우선 족제비가 있는데 큰고양이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새끼고양이는 물어간다. 산에 멧돼지도 많아서 산책로까지 자주 내려 온다. 나도 가까이에서 여러 번 목격한 터라 이 고양이가 밤에 무방비로 있다가는 족제비한테 잡힐 것만 같았다. 어제 본 그 여성처럼 이번엔 내가 어정쩡하게 서있게 되었다.
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호소력있게 울기까지 했다. 그때 누군가 “혹시 이 고양이 아세요?”,하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강아지 꼬미엄마라고 소개한 뒤 고양이에 대해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꼬미엄마는 태풍이 오기 전부터 고양이 형제를 봤다고 했다. 지금은 노랑 고양이 한 마리뿐이지만 원래는 고등어 무늬의 회색고양이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태풍 카눈을 바로 이곳에서 둘이 이겨냈다. 태풍이 끝나자마자 와봤는데 털끝 하나도 젖지 않고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대신 아이들은 며칠간 먹지 못해 바싹 말라 있었다. 태풍에 비가 쏟아져서 어디 하나 물이 없는 곳이 없었을 텐데 본능이 대단했다. 태풍까지 잘 이겼는데 한 마리는 어디로 간 걸까. 먹지 못해 허약해져 병이 들었거나 누가 물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고양이의 내력과 거취에 대해 모기에게 물려가며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내가 또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도 2주격리를 완벽히 수행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리를 끝내고 아직 입주하지 않아서 우리 집이 비어있었다. 새로 고친 집에 처음 살게 된 생명은 바로 이 고양이가 되었다. 남편 몰래 데려다 놓고는 저녁에 넌지시 말했다. 남편이 가구배치 구상한다며 저녁마다 새집에 들락거렸기 때문에 숨길 것도 없이 당일에 바로 고백했다. 이번엔 꼭 입양을 보내겠다고 장담했다.
다음 날부터 병원진료를 하고 입양대책회의를 했다. 낮에는 꼬미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고양이랑 놀아주시고, 밤에는 내가 와서 놀았다. 이름도 지었는데 도담이다. 도담이는 운동장같이 넓은 42평집을 누비며 신나게 놀았다. 달리기하다가도 멈추고 싶을 때는 급브레이크도 밟고, 사냥놀이할 때 곡예사처럼 위로 튕겨오르고, 날로날로 예뻐졌다. 좋은 입양처를 찾고 싶으면서도 보내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내 마음이 무엇인지 나도 나를 알 수 없는 나날이었다. 직장은 여전히 힘들었고,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서 잠시 앉아 도담이를 쓰다듬어주면 금방 손에서 잠이 들었다. 이렇게 순하고 예쁠 수가... 내가 키우고 싶었다.
새로 고친 집에서 예쁘게 사진을 찍어서 올리니 금방 입양이 성사되었다. 격리 2주가 끝나자마자 인천으로 입양을 갔다. 헤어질 생각에 아쉬워서 입양 전날 새집에서 나랑 둘이 잠을 잤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새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담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밤새 골골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내 머리에 꼭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사소한 일상이 아픔을 잊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정말 그랬다. 밤새 골골대는 고양이와 하나가 되어 나도 골골 리듬에 맞춰 시름을 하나씩 떠나보내고 있었다.
생후 1일차에 떠들썩하게 울어서 우리와 가족이 된 밀이, 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려 가족을 찾은 도담이를 보면 운명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모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 작은 생명에게 내가 배운다. 나도 내 운명을 만들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했다. 고양이와 교감하며 조금씩 시름도 떨쳐낸다. 나만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주장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고양이가 어른도 가르치는 선생이다. 물론 배울 마음을 갖고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도담이 너무 예뻐요. 밀이 도담이처럼 저도 제운명을 바꿔보려 순간순간 노력해야겠어요. 홍홍님, 살면서 힘든일 많이 있지만 우리 힘내서 열심히 살아보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