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중산층,
그 보다 좀 더 유복한,
비교적 여유로운 부모님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나의 뒤로 3살 터울의 남동생과 5살 터울의 여동생까지.
주변에 3명의 자녀가 있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지만 사업을 하시는 아빠와 전업을 하며 헌신적으로 육아를 하시는 엄마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랐다.
어딜 가나 사장님, 사모님 소리를 듣는 엄마, 아빠덕에 내 어깨도 같이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10살이 되기 전까지.
아빠의 무리한 사업확장과 친구들에게 써주었던
수많은 보증들은 IMF 시기에 파도처럼 우리 가정을 덮쳤다.
쫓기듯이 모르는 동네로 이사를 왔고,
부모님은 이혼하셨으며,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우리 삼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당에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나는 저소득층 지원금을 받으며 학교를다니게 되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상황에 불만을 가질 새도 없이,
나는 이제 K장녀로서 동생들을 돌보고 엄마까지 챙겨야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브랜드 옷과 운동화, 이런 건 나에게 사치였다.
엄마에게 미안해서 차마 갖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울면서 힘듦을 토로했다.
돈이 없어서 힘들어했고, 본인의 삶을 비관했다.
집에 울리는 전화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대부분이 돈을 갚으라는 빚독촉 전화였다.
엄마가 계셨음에도 엄마를 찾는 그들에게
집에 어른은 아무도 없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가진 건 없고 할 수 있는 건 노력뿐이라 공부만 했고,
그 마저도 어쭙잖은 성적 탓에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아닌
애매하면서도 평범한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우리학교는 토요일마다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는데 하루는 친구가 도시락을 두 개를 가져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도시락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후 몇 분 뒤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갔다.
선생님은 나에게 도시락을 챙겨 오는 게 힘들면
봉사활동하는 친구들의 도시락을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하..!
그때 느낀 비참함이란,
결심했다. 돈에 아쉬운 사람이 되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