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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뽀리 Jul 06. 2024

공무원은 만능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나요?

7년 간 5개 부서에서 적응하며 살아남기

첫 발령지인 행정복지센터에서 1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자 나는 소속 지자체의 본청(예; 시청, 구청, 군청 등)으로 전보를 가게 되었다.


두 번째 부서는 사회복지과였다.


아무래도 주된 업무가 복지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복지직렬의 직원들이 메인이고 나와 같은 행정직은 마이너가 되는 곳.


그곳에서 맡은 업무는 서무와 정신요양시설 지원업무, 사회복무요원 관리였다.


비교적 가족 같던 분위기의 행정복지센터와는 다르게 본청은 보다 사무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였으며 

본인 업무를 하기에 다들 바빴다.

안 그래도 일찍 입사를 한 탓에 또래를 만나기 어려워 편하게 이야기를 하며 지낼 직원들이 없었다.


'복지'라는 생경한 업무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내 업무 중 하나인 정신요양시설 지원업무는, 

분기별로 국가보조금을 받아 정신요양시설에 교부해 주고, 당초 계획한 목적에 맞게 사용이 잘 되었는지 지출증빙서류를 검토하며 정산하며, 운영이 잘 되고 있는지 지도 및 점검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1억, 10억, 100억이  넘어가는 단위의 보조금 예산,

지출하기 전까지 서류에  0이 몇 개인지 수없이 확인하고 확인하며 가슴을 졸이면서 일을 했다. 


당시 나이가 25살이었는데,  시설에 지도점검이라도 나가는 날이면

나이 지긋하신 시설장님과 담당자분들을 '감사'해야 하는 것이, 

그리고 그런 나를 윗사람 모시듯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그 외에 기본적인 서무업무를 하며 관내 사회복지시설(정신요양시설, 노인요양시설, 아동복지시설 등)에서 

복무하고 있는 사회복무요원들의 매월 출근기록부를 확인하고 급여를 주는 일도 함께 했다.


사회복지과에서 일을 하는 동안 부서장은 3번이나 바뀌었고 적응과 적응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또 1년 8개월 만에 나는 다른 부서로 세 번째 전보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기획예산실이었다.


신규시책을 발굴하고 규제 개발과 규제개혁위원회 관리, 공무원 정책제안,  국민제안 등의 업무를 맡았다.

심지어 공무원신규시책발표회에 참가해 민원안내용 자율주행로봇을 만드는 사업까지 하게 되었다.


'내가 로봇을 만들다니..?'


그동안 해왔던 일과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업무였다.


이때 마음고생을 꽤나 했다.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 잘 본인의 업무를 척척 해내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책상자리만 차지하고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내용의 업무와 지침서를 읽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더욱 눈치를 보며 일을 하게 됐다.

게다가 연차 높은 분들이 많이 계신 부서라서 더욱 주눅이 들고 위축되기도 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밝은 척 막내역할 톡톡히 하며 맡은 바 성실히 수행했고, 

팀과 부서 분위기도 좋아서 직원들과 종종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기획예산실에서 근무를 하면서 나는 7급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고,

 승진과 함께 다시 행정복지센터로 네 번째 전보를 가게 되었다.


1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로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보통 신규직원의 경우 행정복지센터에 제일 먼저 일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 승진을 하고 행정복지센터에 가보니 그제야 내 또래의 신규직원들이 제법 있었다.

비록 직급차이는 났지만 친구도 사귀고 정말 마음 편하게 직원들과 어울리고 일하는 게 조금 재밌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발병했다.


공무원인 나는 여전히 일선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마스크를 쓰고 일회용 장갑을 끼면서 일을 했다.

사망자와 감염자 수가 늘어나면서 나 또한 매일 불특정 다수를 만나며 일을 하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전례 없던 감염병으로 공무원들의 업무가 가중되었다.


사람들에게 나눠 줄 마스크를 포장하고, 재난지원금 카드를 교부하는 것부터 시작해

감염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감염자수칙을 안내하고, 그들이 약이 필요하다고 전화라도 오면 밤이고 낮이고 약배달까지 다녀왔다.


모두가 혼란스러웠던 팬데믹을 지나 어느덧 코로나19도 일상에 스며들었다.

1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스크 수급과 백신 보급안정화되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얼굴로 외출하는 것이 어색해졌다.


나는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 다섯 번째의 전보를 하게 되었다.

최단기간, 1년 1개월 만의 전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당장 발령일이 내일인데 오늘 전화 와서 사령장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굉장히 어이가 없었지만

말단 공무원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가라면 가야지.


이번에는 본청 회계정보과의 계약팀이었다.

우리 조직에서도 계약팀이라고 하면 일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야근은 기본이었다.


그래도 주위에서는 영전이라고 '위로'해줬다.


일이 많아서 힘은 들겠지만, 내가 그동안 잘해서 계약팀에 간 거라며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실제로 굉장히 많이 배웠고, 내가 공직자 생활하는 동안 도움이 많이 되는 업무였다.


게다가 워낙 일이 많고 힘들었기 때문에 팀원들끼리 똘똘 뭉쳤고 팀 분위기도 좋았다.

일이 힘들어도 사람들이 좋으면 버틴다는 말이 있는데 딱 그런 케이스였다.


그리고 계약팀 직원이 자주 바뀌는 것을 지양하는 분위기라 평균 2~3년 정도 전보하지 않는 팀원들이 많았고,

나도 드디어 지긋하게 한 곳에서 업무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약팀에서 소위 '시즌'이라고 불리는 첫 연말을 보내게 되었다.


당해연도의 예산을 모두 소진하기 위해 사업부서에서는 무섭게 용역, 공사 등을 발주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업 마무리를 하고 지출하기 위해 미친 듯이 청구서를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해가 바뀌는 1월 1일부터 사업시작을 하기 위해 미리 계약을 요청했다.


내가 일을 쳐내는 것보다 서류가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서류에 둘러싸여 일을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 정말 서류더미 속에서 일을 했다.


당시 사무실이 4층이었는데 1층에 있는 구내식당까지 내려갈 힘이 없어서 김밥 한 줄 시켜 먹으며 일을 하기도 했다.


아침 7시, 8시에 출근을 해도 10시가 넘어서 퇴근을 했고, 

잔업을 하기 위해 주말에 출근하면 팀원들도 하나둘씩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손목이며 어깨,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1시간 외출을 쓰고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은 뒤 출근을 했고, 

그 한 시간 사이에 쌓이고 있을 서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렇게 나는 고장이 나고 있었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출근이 무서워졌다.


당시 남자친구가 심각성을 느끼고 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

각종 심리검사를 마친 후 만나게 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과 불안지수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울면서 출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입원하면 대신 일해줄 사람도 없고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횡설수설했다.

나 하나 없어도 조직은 잘 굴러가는데 내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굴며 충성을 바쳤다.

 

그때부터 나는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울면서 출근을 하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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