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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nd 18

아버님의 짝사랑

by 이지랖


지금 내가 천국에 와있나?

시아버님이 요양원에 들어가시니 이렇게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수가..하늘이 저렇게나 높고 이뻤나?

내가 예쁜 줄을 알았지만 이렇게나 뽀얗고 광이 났다고? ㅋㅋㅋ(살짝 제정신이 아니니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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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달에 2번은 꼬박꼬박 방문했다. 대신 남편에게

나는 며느리니 아버님 돌아가시는 날까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너랑 결혼한 대역죄인이니까)

대신 형님들하고는 연락할 일 없다 아버님 장례식장에서나 만날 것이니 더이상은 바라지 말라고 똑똑히 말해줬다.


여느 때처럼 진상품 잔뜩 준비해 요양원 방문한 날!

아버님께서 다음에 올 적에는 예쁜 브로치 2개를 사갖고 오라신다. 그것도 포장까지 해서.

예? 브로치요?

어떻게 생긴거요? 여쭤봤더니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이 목소리를 줄이시더니


“ 가장 이쁘고 화려한 걸로 사온나.”


느낌이 팍!왔다.

내가 눈치밥으로 살아온 외길 인생인데 이 이상한 공기의 흐름을 놓칠리가 있나.

일단을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쓰레기 버리는 척 복도로 나왔다.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고 혹시나 해서 실장님께 물어볼 참이다.

요양원 원장님 딸인 실장님은 내 딸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 같은 며느리 입장에서 많이 도와주신다. 미리 알려줄 일이 생기면 귀띔도 슬쩍슬쩍 해주시는 고마우신 분이다.


갑자기 그 물리치료사님이 떠오른건... 확실하다. 나의 촉!

슬쩍 실장님한테

“물리치료사님이 울 아버님 성격을 잘 맞춰주시나봐요" 하고 툭 던지니 바로 알아들으시곤 씨익 웃으신다.


나는 봤다.

면회와서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물리치료사님을 쫓는 아버님의 눈빛을. 50대 후반 정도 돼 보이고 성격도 호탕하신데 어르신들 비위도 엄청 잘 맞춰주신다.

게다가 이뿌다! 그럼 뭐.. 게임 끝!! ㅋㅋㅋㅋ

이쁘면 됐지 뭘 더.

오케이 브로치 2개!

읭? 그런데 왜 2개지? 양쪽에 한개씩 차고 댕기라고?

눈치빠른 내 예상 정답은 이렇다. 물리치료사님한테만 주면 창피하니까 옆에 계신 다른 간호사쌤한테도 드릴려는 위장 브로치? 아닐까싶다. 와우 ~ 울 아버님 명석하십니다!

이거이거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할라니 진짜 입이 근질거려갖고 ㅋㅋ

주문하신 브로치 2개 빠르게 가져오라고 하셔서 바로 구매대행 나섰다.

저~~기 100m 밖에서도 번쩍거려서 눈이 부실정도의 화려함을 갖춘 비싼 브로치 1개! 이쁘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저렴한 거 1개. 포장지까지 다르게 해서 준비한 뒤 아버님 숨 넘어가시기 전에 후다닥 배송완료!

아버님께 넌지시 작은 박스를 가리키며 아버님! 이게 더 이뿌고 비싼겁니다하고 말씀드렸더니 알았으니 우리보고 그만 가란다. 아니 저 방금 왔는데요 면회 3분했는데 그냥 가요? 뒤도 안돌아보고 휠체어 타고 들어가버리신다.


아.....그렇게 하시면

저는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아버님이

며늘아! 하고 부르신다. 뭘 잊으셨나 하고 뛰어갔더니 외투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 1개를 꺼내 나에게 내미신다.


“고맙다! 너 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먹어라.”


봉투에는 브로치 고르느라 애쓴 며느리 노고에 대한 보답인 양 빳빳한 5만원짜리 4장이 들어있었다. 처음 주신 용돈도 아닌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마음이 울컥할까?

시큰해진 코를 부비며 돌아섰다.

아마 이젠 아버님을 이해하는 내가 되어가나 보다...

개뿔!!!



그럼 그렇지 !!내 마음의 울컥함을 단 10분만에 와장창 깨버리는 전지전능하신 분! 울 아버님 진짜 리스펙이다

난 시댁을 다녀오거나 요양원을 다녀오는 길엔 무조건 카페에 들른다.

이대로 집에 갔다가는 내 몸에 묻은 안좋은 감정들이 온 집안에 퍼질것만 같아 꼭 카페에서 찐한 아메리카노와 달달한 디저트로 내 자신을 달래고 간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고 한번도 거른적은 없다.

오늘도 분노하지 않고 폭발하지 않고 며느리직을 잘 해낸 내 자신에게 치즈케이크 한입 먹여줄라는데 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전화를 받은 남편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왜왜? 뭔 일이야?

아버님 혹시 고백같은 거 하신거 아니지? 두근두근...


”아버지가 가죽 잠바 사오래.“


예? 가죽 뭐요?

한 겨울에 웬 가죽 잠바? 전립선이 안좋아서 소변줄 차고 휠체어 타고 계신 양반이 가죽잠바 입고 어딜가실라고?

색은 밤색, 목 둘레에는 털이 있어야 하고 가죽이 차르르허니 빛이 나는 고급이어야 한다고 아주 설명도 구체적이다.. 다음 주까지 꼭 가져오라신다. 발등에 또 불 떨어짐.


지금 내가 치즈케이크나 때려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일어섯!

남편과 딸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또 나만의 스파이? 요양원 실장님께 전화를 했다.

누가 요양원에 가죽잠바 입고 댕기신답니까? 분명 아버님이 보신 게 있으시니 저리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싶었다. 밤색 가죽잠바 입고 울 아버님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신 분 그 누구시란 말입니까? 실장님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뭔가가 떠오른듯

”어르신들 모시고 병원 다녀오시는 남자 간호사님이 엊그제 가죽자켓을 입으신거 같은데 그거 보고 욕심나셨을까요?“

어떻게 생겼나요? 혹시 사진이라도. 저 급해요!!

실장님은 사진은 없고 인터넷 찾아서 비슷한 거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복 받을실껴 울 실장님은!!

실장님께 받은 가죽잠바 사진은..흠...백화점으로 가면 안될 것같은 ...

생각해보니 그 남자 간호사님도 나이가 많으셨던 것 같던데. 60대 초반쯤.

그래도 메이커 안사오면 화내시니까 일단 백화점으로 가서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없다.

메이커 옷 매장, 아웃렛! 다 돌아봤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사진을 보여주며 수소문해봤지만 이런 옛날 스타일은 요즘 잘 안찾으신다며 없단다. 밥도 안 먹고 돌아다녔더니 배도 고프고 딸은 칭얼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일단 그럼 인터넷으로 검색해봐야겠다. 근데 어째 다 해외배송이냐.(중국산)

그 옛날 스타일 레자 잠바를 딱 찾아 문의게시판에 배송문의를 남겼다. 판매자분께서 늦어도 금요일까지는 꼭 받게 해드릴테니 걱정말고 주문하라신다. 휴~이제 안심이다.


그런데...목요일이 돼도 금요일이 돼도 감감무소식이다. 판매자분께서 갑자기 현지 사정으로 약속한 날짜에 도착이 어려울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신다. 취소해드릴까요 ? 아니요! 취소하지 마세요! 빨리 약속하신 레자 잠바 배송해주세요 저 진짜 혼나요! 고객과의 약속을 목숨처럼 지켜주셔야죠 사장님!!!저한테 왜 이러세요~

주어진 기한을 하루 앞둔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님께 내일 간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어쩌라고! 회사고 업무고 다 던져놓고 조퇴를 했다. 지하상가로 급하게 뛰어가서 옷집을 또 다 뒤졌다.

헙! 있다 있어. 밤색! 목에 뽀쏭 털! 반지르르 딱 봐도 가죽같지 않은 레자 잠바! 포장까지 마치니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러다 진짜 단명하지 싶다.

아니 내 민원은 처리도 못하고 언제까지 울 아버님 민원만 이렇게 목숨걸고 처리하고 다녀야되냐.. 어쨌든 미션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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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눈 뜨자마자 요양원으로 달려가 레자잠바를 드렸더니 또 나보고 올라오지 말고 그냥 가라신다.

흠..왜??도대체 뭘 하실라고???

그렇게 몇 주는 잠잠하더니만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주에 꼭 오시라고. 아버님 기분이 몹시 안좋으셔서 요양사분들이 엄청 힘들어한다고.


왜 또? 뭔일일까나.. 죄송한 마음에 요양사님들 드릴 양말이랑 간식들까지 챙겨서 갈 준비를 했다.

실장님께 전화가 왔다. 순간 가슴이 또 철렁! 이러다 심장병 걸리지 내가 진짜.

이쁜 50대 물리치료사님이 다른 요양병원으로 이직을 하셨단다. 오 마이 갓!! 그래서 아버님이 요즘 매사에 짜증이고 트집을 잡으신다고.

혹시 아버님! 아버님이 너무 관심을 보이고 추파를 던져싸서 그 분이 다른 곳으로 가신 거는...설마...아니죠? 흠흠.


그렇게 요양원에 계신 아버님을 달래드리고 가끔 하달해주신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 하다 내 마음이 지쳐갈 때쯤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요양시설이 폐쇄됐고 가족들의 요양원 방문이 전면 금지 됐다.


하!~ (이러면 안되지만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앞으로는 더욱더 착하게 살겁니다. 매달 하는 기부도 조금더 늘려볼께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지?

요양원 안가서 몇 주는 눈물나게 좋더니만 점점 길어지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걸려서 돌아가신 노인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는 연일 보도됐고 확진자는 장례식조차 제대로치를수 없다는

소식에 걱정이 늘어만 갔다.

아버님 꿈도 꿨다. 자식들 얼굴도 못보고 쓸쓸히 폐쇄된 요양원에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맨날 걱정만 쌓아놓고 했더니 젤루 잘하는게 걱정이 돼버렸다.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면회는 안된다니 그냥 멀리서 아버님 잘 계신지 얼굴만 보고 가면 안되겠냐고 했다. 멀리서 눈인사 정도는 해도 된다고 오란다.

남편을 흔들어 깨워 당장 요양원으로 갔다. 멀~리서 휠체어에 앉아계신 아버님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우리에게 손을 훠이훠이 흔드시는 그 모습에 왜이리

내 마음이 저릿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만 줄줄 흘리다 왔다. 이게 정인가? 미운 정??

오지말라는 데 굳이 찾아가서 손까지 흔들고 올거는 또 뭐냐.

이런 내가 나도 아주 꼴뵈기 싫어 딱죽겠다.

그 뒤로도 울 아버님은 멀리서라도 보게 자꾸 오라고 전화를 하셨고 아버님께서 평소에 요양원에 뿌려놓으신 인정(money)덕택인지 다른 분은 안되지만 특별히 면회하게 해드린다며 조용히

오시란다. 아니 왜 평생 안 받아본 특별대우를 요양원에서 해주십니까? 저는 절~대 괜찮습니다. 안해주셔도 됩니다!! 끄~응

그렇게 코로나 때도 나는 평소처럼 요양원을 드나들 수 있었다. 보건복지부에 확! 신고해부까. 방역지침 어겼다고!!요양원 관계자측의 선처에 행복해서 아주 눈물이 나는구먼.



코로나가 종식 되기 전까지 아버님은3번 , 나는 2번 확진됐다. 짝사랑?에 실패하신 뒤로는 점점 활력을 잃어가셨다. 새벽에 화장실 가다 넘어지셔서 골반뼈가 골절되는 바람에 어렵게

큰 수술도 하셨다. 전립선 쪽은 더 악화돼서 암이 아닐까 병원에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연로하셔서 힘든 검사는 의미없으니 하지 말자고 했다. 어차피 천식이 심해 전신마취가 불가능하니 수술은 어려운 상태였고 (혹시 암 일지라도)암도 환자 나이가 많으면 진행속도가 더디단다. 그렇게 잦은 입.퇴원을 반복하는 사이에

아버님이 각혈을 하기 시작하셨다. 폐암 4기 판정을 받았고 병원에서는 길어봐야 앞으로 6개월이란 말씀을 하셨다.





<다음 주 마지막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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