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뜨겁게, 나를 살아낸 시간

by 앙또아


학창 시절 내내, 나는 지각과 참 친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땐 걸어서 10분, 뛰면 5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매일 아침 알람이 울리면 손을 뻗어 끄고는 이불 속에서 “조금만 더…”를 중얼거리며 뒤척였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 어느새 등교 10분 전. 빛의 속도로 씻고, 가방을 메고, 신발을 꾹 눌러 신은 채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헝클어진 머리, 헐떡이는 숨을 안고 바람을 가르며 교문을 통과하던 아침들. 그게 바로, 나의 학창 시절 아침 풍경이었다.


그런 내가, 학원 첫 수업 날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망설임 없이 이불을 걷어내고, 차분히 준비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 집에서 학원까지는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등굣길과 출근길이 겹치는 시간이라 버스는 멈추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지하철역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나라도 놓치면 지각이다 싶어, 환승역에서는 앞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뛰듯 이동했다. 가방끈을 고쳐 메고, 숨을 가다듬으며 지하철에 올라탔을 땐 가슴이 두근거렸다. 피곤함보다 설렘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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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디자인 첫 수업 날, 강의실은 서먹한 공기로 가득했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각자의 삶을 잠시 멈추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웹디자인을 하던 사람, 의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 문구 회사에서 나온 사람... 모두 다른 길에서 왔지만,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수업은 매일 오전 9시에 시작됐다. 정오쯤 강의가 끝나면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빈 강의실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자율 학습을 하며 하루를 채웠다. 평일 내내 반복된 이 생활은, 마치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다 외우기도 전에, 마음부터 가까워졌다.


수업은 매 순간이 신선했다. 기초 드로잉에서 시작해, 세상을 자신만의 감성과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 시장조사와 기획, 콘셉트 설정을 거쳐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일까지. 단순히 그림을 배우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즐거움 속엔 고통도 함께 있었다. 어디에도 없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매일 머리를 싸매며 스케치북을 넘기고, 또 넘겼다. 캐릭터의 외형은 물론, 성격과 말투, 좋아하는 음식, 살아가는 공간의 모습까지. 캐릭터는 점차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갔다. 나는 또 하나의 세상을 그 안에 만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3개월이라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그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단 걸 깨달았다. 강의 막바지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밤늦도록 학원에 남아 작업에 몰두했다.


진짜 전쟁은, 수업이 끝난 오후부터였다. 형광등 불빛만 덩그러니 켜진 강의실엔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마우스 클릭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뿐.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짜며 씨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괴롭고 고된 시간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눈이 뻑뻑해지고 어깨가 뻣뻣해질 무렵이면 누군가 편의점에 다녀와 음료랑 과자를 책상에 풀어놓고, 잠깐 수다를 떨며 숨을 돌렸다. 그러다 어깨너머로 서로의 화면을 슬쩍 들여다보다가 “오, 잘하고 있네!” 한마디가 툭 튀어나오면 신기하게도, 바닥난 에너지가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학원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강의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밤 10시가 가까워지면 막차 시간 때문에 아쉽게 짐을 챙겨야 했다. 하루 종일 땀 흘리며 함께 고군분투한 시간이 쌓이자, 수강생들 사이엔 어느새 전우애 같은 게 생겨났다. 말이 없어도 서로의 고단함을 알아보고, 조용히 등을 두드려주는 그런 관계.


그 시절 함께였던 스무 명 중,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다섯 명이 있다. 가족 외엔 좀처럼 약속을 잡지 않는 나지만, 이 모임만큼은 1년에 몇 번씩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점심에 만나 수저를 들기 전부터 수다가 시작되고, 커피까지 마신 후에도 헤어질 줄 모른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져 있고, 대화는 여전히 이어진다.


학원 시절 이야기는 모임 때마다 빠지지 않는다. 수십 번은 나눈 얘기지만, 우리는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웃고 또 웃는다. 그때의 모든 순간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요즘 노래를 듣다 보면 유독 청춘을 이야기하는 가사들이 많다. 그런 노래를 들을 때면, 내가 떠올리는 건 학창 시절이 아니다. 내게 청춘은 오히려 그 ‘학원 시절’이다. 가장 뜨겁게 나를 살아냈던 시간. 꿈과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었던 순간들. 몸은 지쳤지만 마음만큼은 날아오를 것 같았던 나날들. 그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기에, 그래서 더 빛났고 더 소중했다.


"푸르른 공기가 날 사무쳐 안아
하늘을 날을 수 있을 듯한 밤이다
잔요동이 헤엄쳐 오는 곳으로 가자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을 향해서
뛰어오르자"
– 이무진, 『청춘만화』 가사 중 –


이 가사를 들으면 늘 떠오른다. 늦은 밤,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을 빠져나오던 순간. 형광등이 꺼진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면, 한기가 훅 밀려왔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공기마저도 어딘가 개운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자연스레 무리를 지어,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누구는 연신 하품을 했고, 누구는 오늘 만든 캐릭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발걸음은 이상하게 가볍고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도란도란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던 그 길, 스케치북이며 펜이며 이것저것 든 무거운 가방도, 그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 길 위에 남아 있던 웃음과 피로, 떨림과 희망은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살아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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