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복권은 애석하게도 꽝입니다
사십여 년 간의 결혼생활 대부분을 다투고 서로를 비난하기만 하다가 결국 갈라 선 엄마와 아버지에게도 유일하게 겹치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당신들의 장남에 대한 지나친 편애와 의존이었다.
부모님은 늘 장남에게만은 관대했고 집안 형편 상 마음껏 지원해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우리 집을 일으켜 줄 무슨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며 장남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런 부모님에게 당시 누나들과 내가 느꼈을 박탈감과 소외감 따위는 애당초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특히 엄마는 배우자인 아버지를 대신한 자리를 장남에 대한 애정으로 보상받고자 했다. 어린 내 눈으로 봐도 마치 집안에 어른이 한 명 더 있는 느낌일만큼 장남을 특별히 대했고 존중하려는 게 보였으며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날이 멀어지는 사정과 비례해서 그 정도는 더더욱 심해져 갔다.
그러나 장남을 향한 삐뚤어진 애착이 쌓여갈수록 그는 안하무인의 괴물로 변해갈 뿐이었다.
엄마를 이해하는 살가운 아들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존재마저 외면하듯 무시했다. 어느 날인가는 엄마와 싸우던 아버지에게 몸싸움이라도 걸듯이 대들기도 했고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동생인 나와 둘째 누나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나 남자인 나를 향한 폭언과 폭력은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무서웠고 괴로웠지만 달리 하소연할 데도 없었고 막상 해 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남이 자신에게 대들던 상황에서도 화를 내는 대신 말없이 고개를 돌린 것처럼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로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았다. 하물며 장남과 유독 가까운 엄마는 당연히 그의 편을 들 게 뻔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니가 이해해
형이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겨우 여덟아홉 살이나 됐었을까. 장남은 부모님이 없을 때면 나를 동네 가게로 보내서 라면 과자 음료수 같은 걸 외상으로 가져오게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 상황이 너무나 부끄럽고 가게 주인 앞에서 입을 떼기조차 힘들었지만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 얻어맞을 걱정에 거부하지 못하고 심부름을 해야 했다.
처음 외상에 성공하자 장남은 갈수록 대범해져서 요구하는 횟수와 품목이 차츰차츰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엄마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진 채로 그 간의 사정을 털어놓게 됐는데 엄마는 한창 먹을 나이에 용돈이 없어 군것질을 하지 못한 장남이 안쓰러운 듯 이렇게 말했다.
니가 이해해
형이 얼마나 배고팠으면 그랬겠니
동생 공부시킨다는 핑계도 장남이 자주 써먹은 방식 중에 하나였다. 하루에 성문영어 수십 페이지를 필사시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분량의 숙제를 내주고는 그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매서운 폭언과 함께 사정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럴때면 장남의 눈빛에 허연 광기가 비쳤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장남은 곧잘 “엎드려 뻗쳐”를 시킨 채로 각목 같은 걸로 때리는 것에 재미를 붙였는데
그러다 한 번은 허리를 잘 못 맞아 잠깐동안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 밥도 안 먹고 내내 누워만 있던 나를 보고 전후사정을 알게 된 엄마는 장남을 불러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내 잘못을 지적했다.
하기로 한 숙제를 안 해서 그렇잖아
형이 너 잘 되라고 그랬겠지 미워서 그랬겠어?
니가 이해해
얼굴을 맞아 콧날이 휘고 이가 깨지고 그런 날에도
엄마는 앵무새처럼 내게 말했다.
니가 이해해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장남은 미대 입학을 꿈꿨으나 총 4번의 입시에 모두 떨어졌고 더는 군입대를 미룰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때에도 엄마와 아버지는 장남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한 이유가 오로지 자신들이 돈이 없어 좋은 학원엘 보내지 못해서라며 미안해하고 자책했다. 당신들의 장남은 남들보다 실력이 있고 자격이 충분한데 오로지 가난한 부모의 뒷바라지가 그들보다 부족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장남이 마지막 4수도 실패하고 떨어진 날, 나에게 학교 대신 공장이나 가라던 아버지는 걸음이 휘청이도록 술을 마셨으며 엄마는 돈 있고 빽 있는 애들에 밀려서 내 자식이 이렇게 됐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 후로 장남은 18개월의 방위병 생활을 마치고 이십대 중반까지, 두 번인가 더 대학입시를 준비해 미대를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이름만 들어서는 생소한 무슨 산업대를 2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어려서부터 늘 주변의 또래들이나 사촌들과 비교해가며 입이 마르도록 자랑해 왔던 장남의 연이은 입시 실패는 부모님의 입장을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장남이 군대에 가있는 그동안만이라도 집안에서 평안하기를 꿈꾸며 그의 입대일자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마저도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애초에 현역으로 입대했던 장남은 훈련소로 떠난 지 3일 만에 돌아왔고 그 후 18개월 동안 집에서 출퇴근하며 방위병 생활을 이어갔다. 엄마와 아버지는 더없이 안도하고 기뻐했겠으나 나로서는 심장이 딱딱해지듯 답답하고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달라진 건 내 몸이 자라고 커지면서 장남이 행하던 폭력의 빈도가 그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