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간들
초등학교 때 새 학년이 되면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걸 써서 제출하고는 했다.
부모의 학력, 직업은 기본이고 살고 있는 집이 자가인지 아닌지, 또는 당시로선 흔치 않은 고가품으로 취급받던 칼라 TV, 전화, 침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아주 세세한 집안 살림까지 적어 내야 할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까마득한 얘기지만 유선 전화가 있는 집이 한 반에 절반이나 될까 하던 시절이었다.
(* 우리 집에 전화가 놓인 건 내가 12살 때다)
이버지는 조사서를 써주면서 본인의 학력을 "대졸", 직업은 "상업"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최종 졸업학교를 "ㅇ대학교"로, 또 어떤 때는 "ㄱ대학교"로 기재했다는 걸 우연히 발견해 냈고 혹시 잘못 적으셨나 물었더니 "그냥 내"라는 대꾸만 돌아왔다.
몇 년 지나서야 내 아버지의 최종학력이 "고졸"이었음을 엄마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어른들 세대에 그래도 “고졸”이라면 부끄러워할 학력은 아니었을 텐데 굳이 부풀려 가짜로 써낸 건 나를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본인의 콤플렉스를 의식한 허풍 같은 거였을까.
이버지는 날마다 신문을 꼼꼼히 탐독했고 뉴스나 시사프로를 챙겨보았으며 동네 이웃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식인 행세를 했다.
집 밖의 사람들에게는 점잖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졌는지 몰라도 집 안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표현과 내지르는 말투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하고 상처 주는 일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그런 아버지가 불편하고 어려워서 몇 마디 넘겨 대화하기가 쉽지 않았고 꼭 가까이에 가야 할 상황이 생길 때면 나는 점점 더 바닥으로 쪼그라들었다.
학교 집어치우고 공장 가서 기술이나 배워
내가 이제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부 말고 기술 배우라는 소리를 습관처럼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때로는 차분히 설득하듯이 학교 대신 공장을 말했고 자퇴를 권했다. 성적이 썩 우수하진 않았어도 크게 다른 말썽이나 문제를 일으켜 본 적 없던 나는 그때 고작해야 열서너 살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그 말을 얼마나 반복적으로 지주 들었는지 아직까지도 아버지의 당시 워딩 하나하나가 귀에 울리듯 뚜렷하다.
그때 아버지는 진심으로 내 미래를 걱정해서 그랬던 걸까
넌 임마 군대 가 있는 놈이 왜 전화질이야
군복무하던 부대에 처음으로 공중전화가 설치되고 부대원들 모두에게 각자 2,3분씩 가족과 통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마지막 면회가 제법 오래되어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전화했더니 아버지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호통부터 쳤다.
그 후로 나는 남은 군복무 기간 동안 두 번 다시 집에 연락하지 않았는데 전역하는 날 차비가 없어 곤란을 겪던 중에도 훈련소 동기에게 돈을 빌려 가까스로 서울행 버스를 탔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집안 사정과는 별개로 아버지 수중에 마냥 돈이 없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항상 쪼들리고 빠듯한 생활에 신경이 예민해진 엄마가 몇 번쯤 아버지의 지갑을 몰래 꺼내 본 거였는데
그때마다 깨끗하고 반듯한 만 원짜리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가방 안에서는 처음 보는 통장도 발견되었다.
니 아빠 지갑에 한 삼십만 원은 들어있는 거 같더라
집에는 쌀이 떨어져 가는 판에
본인 놀러 다닐 궁리만 해
아버지는 한 집에 살기만 했을 뿐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는 외면과 무시로 일관했고 일상 대부분을 가족과 공유하지도 함께 하지도 않았다.
당뇨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밖에서 자주, 그리고 과하게 술을 즐기는 애주가였고 가족보다 친구를 비롯한 지인들과의 일을 언제나 우선시했다.
내 결혼을 앞두고 아내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상견례 날에도 약속이 생겼다며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축의금을 챙기기에 바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내 결혼에 보태준 것은 단 십원도 없다.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으므로 서운할 것도 없었다.
일이 없는 때는 TV를 보거나 화초들을 돌보는데만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키우던 화초가 어쩌다 시들해지면 그렇게 아쉬워하며 관심을 더했지만 당신의 자식이 멍들어 가는 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또한 묵직한 카메라를 메고 여기저기 여행하듯 다니며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장롱 안에는 이버지만의 앨범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오십 대에 접어들어서부터는 수석 수집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말이고 평일이고 대중없이 배낭 가득 담아 온 돌들을 화장실 바닥에 꺼내놓고 닦고 또 닦았다. 나중에는 조각칼을 가지고 수석 받침대까지 직접 만들기에 나섰는데 갈수록 쌓여가는 그것들을 보며 엄마는 혀를 찼다.
하지만 지인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좋은 곳에 놀러 다니고 사진과 수석 수집 같은 취미생활을 향유하면서도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인색했다.
학비 납부가 늦어져 교무실로 불려 가거나 수업에 맞춰 제때 준비물을 살 수 없는 경우가 흔했으며 단돈 일이백 원이 없어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가 움츠려 드는 일도 잦았다.
열 평 남짓의 월세 아파트에 여섯 식구가 비집고 살던 어느 날엔 아버지가 당시 처음 나온 무선 핸드폰을 수백만 원에 구입해 와서 모두를 기함하게 만들었던 일화는 차라리 웃픈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종교를 통해 위안받기를 갈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행복을 채워갔던 거였다.
하지만 당신이 오랜 시간 나머지 다섯 가족들을 본인의 삶으로부터 배제하고 외면했던 것처럼 엄마가 곁을 떠나고 자식들이 독립해 나가자, 이제는 자신이 홀로 방치되어 고립될 차례였다.
팔십이 너머 아버지는
나에게 딱 한번 고마움을 섞어 사과한 적이 있다.
늙고 병든 몸을
주변 그 어느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았던 때
그런 당신을 데리고 병원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어릴 때 무시하고 그래서 미안하다
그땐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 줄 몰랐어
그러나 그뿐이다.
지나 간 내 시간들이 바뀔 수 없듯이
아버지도 더는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