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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Sep 02. 2024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구원하라

맹신과 집착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순 없지만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무렵부터 어떤 종교에 심취하여 지금까지 열성적인 신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교리 중 대표적인 몇 가지에는 수혈 거부, 병역 거부, 생일이나 제사, 명절 등을 기념하지 않는다..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가족들과 생일 파티라는 걸 해 본 적도, 선물을 받아본 적도, 명절날 친척 집에 놀러 가거나 집안 어른들에게 세뱃돈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


또한 그들은 조만간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종말이 다가올 것이므로 노아의 방주에 오르듯 서둘러 "여호와"(*註 : 그들이 섬기는 창조주이자 절대 신)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야만 영원불멸의 삶을 영유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전도한다.

자칫 "사탄 마귀"의 꾐에 빠져 "여호와"의 믿음을 저버린다면 가늠조차 어려운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무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그러니까 2024년 9월 2일 현재, 지구는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전히 응답을 미루고 있다.










내 가족이 해제됐다고 단정하기까지 여러 요인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무책임, 불화, 경제적 궁핍 등과 더불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엄마의 그 종교이고 성장기의 나에게 가장 큰 절망과 고통을 안겨 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엄마로 하여금 그런 종교에 빠지게 만든 이유는 특별할 것 없이 간단하다. 엄마는 불우한 인생을 개선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답을 찾는 대신, 현실을 비껴가며 종교에 기대어 거기에서 오는 만족으로 공허함을 채워나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장마철이면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구정물이 반지하집 부엌으로 넘치는 일이 다반사였고 이따금 천장을 타고 오가는 쥐들의 빠른 걸음이 우르르 쏟아지듯 울리곤 했던 당시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고 깔끔한 도피처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굳건한 희망과 미래가 있었을 테고 궁상스러운 민낯을 감추어 따로 기죽을 일도 없이 공평하고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리라.    


다만 그 선택이 단지 엄마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불행의 씨앗으로 자랐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나 아버지는 엄마의 종교 활동을 그야말로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다툼과 싸움은 끝없이 지속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경책과 관련 서적이 찢겨 나뒹구는 일이 흔했으며 고함과 폭력이 뒤섞여 더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상이 됐다. 그 와중에 엄마는 자식들, 특히 나를 붙잡고 쉴새없이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주입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엄마에게 아버지는 그들의 성경에 나오는 "사탄마귀"나 다름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린 나이의 내가 도무지 빠져나오기 힘든 심리적 지배이자 세뇌, 가스라이팅의 전형이었다.



물론 이버지의 반대에도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개인별로 한 달에 수십 시간씩을 할당하는 그들의 규칙에 따라 낮에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집을 비우고 외부 전도활동에 열심이었으며 매주 세 차례 씩, 주로 저녁 7시 남짓부터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집회"

(*註 : 기독교의 예배, 천주교의 미사 등과 유사한 종교행사를 이르는 표현)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거기에 신도들끼리의 이런저런 교류까지 더한다면 일상의 상당 부분을 종교 생활에만 할애하는 만큼 가정 살림을 등한시하고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자식들 모두를 "왕국회관"(*註 : 그들의 종교시설을 이르는 말. 교회, 절, 성당 같은)이라 불리는 곳에 데려가 교리를 배우게 했으며 친가 쪽의 제사는 물론이고 명절 때 방문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로 인한 아버지와의 갈등과 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한 번은 가까이 살던 사촌에게 전도하는 문제로 그 집 장손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일도 있었고 자연스레 친척들 사이에서 엄마의 이상한 종교에 대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느꼈을 울화도 여로모로 이해 못 일은 아니었다.











이제 경우 초등학생일 뿐인 나에게 매주 세 번씩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너무나 불편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도 않는 터무니없는 설교를 곧은 자세로 앉아 두 시간이나 들어야 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그 시간에 티브이를 보고 친구와 만나 놀기를 바라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였다. 

하지만 그런 식의 안일한 이유로 집회에 불참한다는 건 엄마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말을 꺼내면 엄마는 일순간 표독스럽게 변한 눈빛으로 단호하게 야단을 쳤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느 해인가  여름날에 모기가 오른쪽 장딴지를 잔뜩 물어서 심하게 부은 일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그 주의 일요일 집회를 빠지며 느꼈던 해방감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엄마의 주장은 늘 한결같았다.



집회를 열심히 다니고 성경 말씀을 따라야 에덴동산에 갈 수 있어
(*註-에덴동산 : 그들이 말하는 천년왕국)



그러나 4남매를 모두 신도로 만들겠다는 엄마의 바람은 결과적으로 실패에 그쳤다. 

첫째 누나를 제외하고, 둘째 누나 - 장남  순으로 한 명씩 그 종교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나갔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는 한동안 날이 바짝 선 사람이 되어 분노하고 힘들어했는데 그 감정들이 나를 향한 집착으로 돌아오면서 집회 참석이나 연구등에 대해 전보다 더 엄격히 대하기 시작했다.

 (*-연구 : 그들의 교리가 담긴 책을 과외하듯 수업하고 공부하는 것)



정말이지 엄마의 가스라이팅은 무엇보다 강력했으며 집요했고 겨우 열몇 살 짜리 소년이었던 나를 옥죄기에 충분했다. 

정작 나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은 뒤로 미루고 억지로 인내하면서도 혹시나 나마저 신도의 길을 포기할 경우 엄마가 받게 될 실망감이 너무 클 거라는 걱정에 빠져들어 차마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는 시들어 갔다.




더는 갈 수 없는 길





훗날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사회적 이슈로 널리 알려지기 전부터 엄마가 소속된 집단의 남성 신도들은 "집총 거부"라는 그들의 교리에 따라 군대에 가는 대신 교도소에서 실형을 복역해야 했다. 심지어 국기에 대한 경례도 "우상숭배" 행위로 부르며 금지하고 고등학교 교련수업마저 거부하는 그들이었다. 

이 나라의 건강한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의무인 병역을 세상이 가하는 일종의 "박해"라 칭하면서 그들의 복역을 믿음의 훈장처럼, 확신의 증표처럼 여기고 바라보는 것이다.

(* 엄마의 전도를 통해 같은 종교의 신도가 된 내 이종사촌은 실제로 36개월가량의 실형을 살고 출소했다.  )



엄마는 어느덧 스무 살이 넘어가던 나 역시 그 과정을 버텨내고 번듯한 일원으로 인정받아 당신의 자랑거리가 되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기간을 엄마를 따라 그 집단에 머물며 교육받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엄마가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포자기하듯 끌려다녔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내게도 어느덧 입영통지서가 날아들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내가 교도소에서 3년의 실형을 버틸 수 있을까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겁이 났고 두려웠다. 

그 자리에서 그려 본 미래는 참으로 암울했고 끔찍했다.

혼자서 수많은 고민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몇 날 며칠을 주저하다가 엄마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본 거였다.




엄마 나 감옥에는 못 가겠어
이제 그만할래





당시의 느낌, 표정, 말투, 분위기.. 이런 것에 대한 기억은 지금으로선 떠오르는 게 없다.

그저 흐릿하다.

조금 긴장했었고 엄마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뭔가 홀가분하거나 그러지도 않았던 느낌만 남아있다.


아무튼 상황은 그렇게 종료되었고 한 때 그들 가운데에서 "연설 잘하는 촉망받는 신도"로 칭해지며 여러 사람의 기대를 받았던 나는 그 집단과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그때가 1994년의 어느 이른 봄이었는데 그로부터 수개월 후, 정확히 8월 30일에 의정부 신병교육대로 입대하는 날까지 엄마는 나를 "있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한 집에 살면서 눈길도 주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며 말을 붙여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엄마에게 있어 나는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시간이 한참 지난 언젠가, 엄마는 무심코 이런 말을 내게 함으로써 당신이 얼마나 자식의 삶에 대해 무례했고 하찮게 여겼으며 스스로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를 증명해 냈다. 



넌 어떻게, 군대 가던 날에 엄마 얼굴 한번 안 돌아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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