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를 목욕시키고 나온 뒤 갑작스럽게 허리통증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자리에 앉아 엉엉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내가 평소 자던 토퍼 매트리스에 누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을 애써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해보려했다. 지금은 저녁이라 당장 병원을 가기 어려우니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병원에가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일 남편이 오전에 근무하러 가야하는 날이었다. 내가 아파서 육아를 할 수 없으니 둘째를 봐줄 사람을 당장 찾아야 했다. 친정엄마, 시어머니도 일이 있어 안된다고 했다. 가능한 사람은 단 한 명. 친정아빠였다. 친정아빠가 아침에 아이를 보러 와주신다고 하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오전에 아빠와 아이를 보며 버티다가 오후에 병원을 가기로 했다. 밤새 너무 두려웠다. 내 허리가 아주고장 나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욱신욱신 나를 괴롭히는 통증에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아침이 되었다. 허리가 욱신거리며 아파오긴 했지만 다행히어제보다는 덜 아픈 것 같았다. 친정아빠는 1시간이 좀 넘는 거리에 있는 친정에서 아침일찍부터 불이나케 달려오셨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빠와 둘이서 아이를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엄마와 아빠, 남편 모두 함께 아이를 돌본 적은 있었지만 아빠가 돌봄의 주체가 되어 아이를 돌본적은 없었다. 친정엄마는 아이에게 우유도 먹여주고 기저귀도 갈아주셨지만 아빠는 늘 소파에 앉아서 혹은 누워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계셨다. 아빠는 그야말로 경상도 남자의 전형이었다. 과묵하고 가부장적이며 술을 먹지 않으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그런 분이었다.
"이거 분유 어떻게 태워야 되노?"
"아빠, 먼저 물 160ml 정도 넣으세요. 분유가루를 5스푼 넣고, 물이 200ml 될 때까지 채워서 흔들어 먹이면 돼요."
5개월 된 둘째를 품에 안고 분유를 먹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매우 생경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잘 어울렸다. 아빠가 둘째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는 모습에 아빠가 아기인 나를 안고 분유 먹이는 모습이 순간 겹쳐 보였다. 다정하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아빠가생각보다 익숙하게 우유를 먹이시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져왔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평생 못 봤을 풍경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기저귀도 갈아주고 아이를 계속 안아주시며 정성껏 돌봐주셨다.
남편이 돌아오고 아빠는 일이 있어 집으로가셨다. 나는 얼른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지역에서 허리 쪽으로 제일 잘 본다는 의사 선생님이 있는 병원이었다. 그 병원은 아주 오래된 종합병원인데, 병원이 익숙한 어르신 환자들이 가득해 늘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접수를 하고 대기하는데 순서가 너무 뒤여서 기다리는게 너무 괴로웠다. 앉아있는 것 자체가 이렇게 고역이라는 것을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서있는 상태에서 앉는 동작을 하기가 힘들뿐더러,겨우 앉았다 하더라도 조금만 있으면 등허리쪽이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불안한 모습으로 진료실 근처를 서성이며 기다리는데 의사 선생님이 할머니 환자에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를 혼내시고 있었다. 마음속에 약간 불쾌한 감정이 생겼지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1시간쯤 기다리니 내가 3번째 진료 차례였다. 근데 3번째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순서가 줄어들지 않아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님. 제가 조금 있다가 아이 어린이집 하원하는데 데리러 가야 돼서 그런데,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그랬더니 천막 뒤에 앉아있는 의사가 대신 말했다.
"1~2시간은 더 걸린다고 그래."
황당했다. 질문은 간호사에게 하였는데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앉은 의사가 하는 말이 1시간은 더 걸린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일단 대기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 10분쯤 더 기다리다 보니 진짜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가서 조용히 다시 물었다.
"간호사님. 정말 1시간은 더 걸리나요?"
그랬더니
"1~2시간도 못 기다리면서 진료는 어떻게 보려고 그래? 시간 있을 때 다시 오라고 그래."
의사가 이번에도 대답을 하였다. 아이를 맡기고 겨우 시간 내서 왔고, 허리가 아파서 겨우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는데 이런 타박 같은 말을 들으니 너무 서럽고 속상했다. 아무리 허리 쪽으로 잘 보는 의사라고 해도 이런 의사한테는 진료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씩씩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병원을 나왔다.
이대로 진료도 못 받고 집으로 갈 수는 없어서추천받은 다른 병원으로 갔다. 근처에 있는 새로 생긴 병원이었다. 들어갔더니 생긴 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대기환자가 적어 금방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난 후에 순간 찌릿하는 통증이 생겼고 뒤 허리 양쪽 부분과 꼬리뼈 쪽에 통증이 심하다고 말했다. x-ray를 찍어보자고 해서 찍고 결과를 보더니 일단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염좌(허리가 삔 것)일 수 있으니 오늘은 허리에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지켜보자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주사를 맞고 진통제, 근육이완제, 위보호제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하필이면 비가추적추적 내렸다.한 손은 우산을 쓰고 한 손은 아픈 허리 뒤를 받치고 걸었다. 오늘 겪은 일과아이를 출산하고 기르면서 몸이 아파진 것에 대한 설움이 겹쳐 마음에도 비가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자꾸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 같은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