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by 아니 에르노-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p.11)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p.16-17)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었다.(p.39)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p.52)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p.66)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p.10)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p.33)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며 걸었다.(p.38)
나를 처음 만난 날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여자 곁에 서서 환심을 사기 위해 웃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p.40)
나는 그 사람이 곁에 없을 때조차도 상상과 욕망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p.45)
호텔이나 공항에서 그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다거나 그 사람이 내게 편지를 보내올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답장을 하기도 했다.(p.48)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낙심하여 잠자리에 들면서 비로소 내가 하루 종일 그 사람이 정말로 전화해 줄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49)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