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정말로' 위험하다
우리가 서점에서 흔히 만나는 니체는 대개 자아실현의 성자 혹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묘사되곤 한다. 청춘의 방황 속에서 운명애(Amor Fati)를 설파하는 그의 문장을 읽으며 위로받은 이들도 많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반항아' 니체의 이미지 뒤에는,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신분 질서의 회복을 꿈꾸었던 지독하리만큼 완고한 정치 사상가가 숨어 있다.
미시간 대학교와 캘거리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을 가르치며 현대 보수주의와 법철학, 그리고 정치 이론의 복잡한 접점을 탐구해 온 매튜 맥매너스(Matthew McManus)는 선집 『니체와 반동의 정치학: 자유주의, 사회주의, 귀족적 급진주의에 관한 에세이(Nietzsche and the Politics of Reaction: Essays on Liberalism, Socialism, and Aristocratic Radicalism)』 로 우리가 오랫동안 외면해 왔거나 혹은 애써 '메타포'로 치부해 왔던 니체의 뒤틀린 정치적 면모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책에 따르면, 니체는 사실 반동 우파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며, 그의 저작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교리를 거부하는 철학적 논거를 제공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니체는 지적으로 철저한 '세척' 과정을 거쳤다. 나치 정권에 부역한 누이 엘리자베스의 왜곡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월터 카우프만 등의 학자들은 니체를 정치와는 무관한 실존주의자나 보헤미안적 개인주의자로 재해석했다. 이러한 흐름은 1960년대 프랑스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들뢰즈와 푸코는 니체를 '권력의 해체자'이자 차이를 긍정하는 진보적 사상가로 재포장했다.
하지만 이 책의 필진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니체는 결코 '탈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철학 전체는 현대의 평등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기획이었다. 우리가 흔히 개인의 마음 수양 도구로 이해하는 '힘에의 의지'나 '초인(Übermensch)' 같은 핵심 개념들은, 사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해야 한다는 '귀족적 급진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정치적 장치였다. 이 책은 니체를 길들여진 고양이로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고, 다시 그를 사나운 맹수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현대 정치에서 가장 혐오했던 대상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였다. 그는 이 세 가지를 ‘신이 죽은 시대’에 살아남은 기독교의 변종이라고 보았다. 니체에게 기독교는 "약자들의 노예 반란"이다. 약자들이 자신들의 열등감을 사랑과 평등이라는 거창한 도덕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하늘 아래 모든 영혼은 평등하다는 거짓말로 강자의 발목을 잡았다면, 현대의 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인권'이나 '보편적 권리'라는 세속적 언어로 바꾸어 유포하고 있다.
니체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기독교의 망령이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된 형태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정의와 평등을 ‘르상티망(원한)’의 산물로 보았다. 약자들이 강자의 탁월함을 시기하여 세상을 하향 평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보며 유럽이 '왜소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는 것은 니체에게 있어 인류의 고귀함을 갉아먹는 행위였으며, 결국 인류를 아무런 야망도 없는 ‘마지막 인간(Last Man)’들의 가축 떼로 전락시키는 과정에 불과했다. 니체의 이론은 단순한 문화 비판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대중을 향한 정치적 멸시였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자유는 모든 이의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귀족의 품성을 지닌 소수만이 누릴 특권이었다.
이 책의 중반부는 니체가 꿈꿨던 대안, 즉 '귀족적 급진주의'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는 옛 왕정으로 돌아가자는 구태의연한 보수주의가 아니다. 니체는 무능하고 비대한 기존 엘리트를 치워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강력하고 잔혹한 새로운 지배 계층을 '사육'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위대한 정치(große Politik)'는 유럽을 통합하여 세계를 지배할 새로운 귀족 카스트를 형성하는 프로젝트였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나 억압, 심지어 노예제조차 문화적 고양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긍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수많은 노예의 희생이 당연하듯, '초인'이라는 문화적 정점을 찍기 위해 대중의 희생은 감내해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다. 그는 "높은 유형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실패작들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믿었다. 이 책은 니체의 폭력적인 이론이 결코 우발적인 실언이나 비유가 아니라 그의 사상 체계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이고르 쇼이헤드브로드(Igor Shoikhedbrod)는 흥미로운 비교를 제시한다. 바로 마르크스와 니체의 갈림길이다. 두 사상가 모두 인간의 ‘자아실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는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여 모든 이가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하는 세상을 꿈꿨다. 반면 니체는 오직 선택된 소수만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다수의 희생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에게 자아실현은 공동체의 연대로 완성되지만, 니체에게는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결국 현대인들은 선택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마르크스주의적(혹은 평등주의적)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탁월한 소수의 영광을 위해 다수의 평범함을 희생시키는 니체적 길을 갈 것인가. 이 책은 우리가 니체의 매혹적인 문장에 취해 니체가 설파한 차갑고 잔혹한 결론을 잊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이 책은 니체의 망령이 현대의 극우 사상(Alt-right)이나 우파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속에 어떻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로널드 바이너(Ronald Beiner)는 니체가 주창한 "진실은 없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는 명제가 어떻게 현대의 '탈-진실 정치'를 낳았는지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고 오직 권력 의지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선동으로 대중을 휘두르는 현대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무기가 되었다.
또한 스티븐 뉴먼(Stephen Newman)은 현대의 대안 우파들이 니체를 뮤즈로 삼아 민주주의의 기초를 허물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들이라는 가축 떼에 저항하는 '깨어 있는 소수'로 설정하고, 인종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니체를 소환한다. 일례로 아인 랜드 같은 철학자들이나 실리콘밸리의 브레인 중 일부는 니체의 '초인' 개념을 스스로를 무지한 대중보다 우월한 존재로 설정하고 사회적 책무를 거부하는 논리로 사용한다. 니체의 철학은 도서관의 철학책에 갇혀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민주적 가치를 위협하는 살아있는 칼날로 작동하고 있다.
니체는 위대한 사상가다. 그의 통찰은 현대 문명의 위선과 나태함을 예리하게 찌른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잔인한 반동적 대안까지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니체를 읽으며 느끼는 짜릿한 해방감은 공동체의 연대와 평등의 가치를 파괴하려는 '귀족적 욕망'과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니체의 망치는 낡은 도덕뿐만 아니라 우리가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의 기둥까지 겨냥하고 있다. 이제 니체를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다. 이번에는 그의 문장에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백신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