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의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
나는 첫째이고, 2살 터울의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첫째는 여러모로 힘들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막내로 태어나고 싶다고.
첫째여서 억울했던 첫 번째는 동생이 잘못해도 내가 혼났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맞고 자라다] 편에서 말했던 맞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나였다. 동생은 엄마에게 딱 2번 정도 맞았던 것 같다. 동생이 친구를 주먹으로 팼을 때랑 게임을 엄마 몰래하다가 들켰을 때.
그 외에는 항상
왜 내가 혼나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부모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는 걸까.
그리고 두 번째는 동생을 챙기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엄마, 아빠는 항상 맞벌이셨다. 돈을 벌지 않으셨던 때가 없다. 그래서 동생의 유치원, 어린이집이 끝나면 데려오고, 집에 오면 밥을 짓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 꺼내서 밥 먹고, 학원 가는 날은 시간 보면서 가라고 챙기고, 숙제 있으면 도와주고, 부모님 늦게 오시면 같이 놀고, 같이 씻고, 재우고, 등교 맨날 같이하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그때 유행하던 유희왕, 딱지치기, 요요 등을 자주 했다) 옆에서 같이 있어주고, 친구네 집 놀러 갔으면 시간 맞춰서 데려오고, 기타 여러 가지 예의범절 가르치고,,, 등등등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아마 더 많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근데 어렸을 때는 이 모든 일들이 힘들지 않았다. 동생이 내 말을 정말 잘 들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하라면 하고, 치우리면 치우고,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조금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동생에게 항상 하던 이야기가 있다
엄마가 없을 때는 누나가 엄마야.
어렸을 때는 당연한 것이라 여겼지만 내가 너무 어렸어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저 말이 나에게 너무 큰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생의 엄마 역할을 하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모든 인간관계에서 항상 주도하고 이끄는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실제로 나를 따르고 내가 하는 말만 듣는 친구들도 많았다.
어쨌든 이 큰 짐은 내가 엄마에게 직접
“엄마, 이제 동생은 엄마가 봐주세요.”
라고 말하면서부터 바뀌었다.
아마 이때가 초등학교 4학년 말쯤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내 말을 듣고 바로 직장을 바꾸셨다.
3시에 퇴근할 수 있는 직장으로.
그 후로는 나도 나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첫째의 역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로 첫째여서 안 좋은 점은 부모의 모든 순간의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다.
모든 일이 서툴고 모자란 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첫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할 시행착오들을 전부 겪어야 했다.
예를 들어, 학원을 여러 군데 바꾸면서 좋은 강사가 있는 곳을 찾아서 이동한다 던 지, 공부의 방향성이니 공부 방법에 대해 어떤 식으로 하는지 나로 인해 길을 찾는다 던 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시기에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무슨 방법으로 알려주어야 할지에 대해 나를 마치 첫 번째 실험체 마냥 나에게 실패했던 방법들은 동생에게 사용하지 않고 성공했던 방법들만을 사용한다.
네 번째는 세 번째의 연장선인데, 나는 누군가를 의지하거나 물어볼 수 없다.
우리 엄마, 아빠는 현재 친가, 외가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지낸다. 그래서 나에게는 친척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빠, 언니가 없다.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중고등학교 때 달라지는 수업 방식이 무엇인지, 수능이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것, 대학을 가면 나이 많은 동기들도 있다는 것.
불안하기 때문에 그때만이 할 수 있는 궁금증들.
물론 엄마가 해준 이야기들도 있지만, 세대 차이가 나기도 하고 현재 학교의 상황들을 아주 솔직하게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요즘에는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라 이런 것쯤 지식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필요했던 건 그런 게 아니다. 궁금증을 해결해 줌과 동시에 넌 잘할 수 있다, 너라면 해낼 수 있다고 무조건적으로 응원해 주는 지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같은 부모 아래 자라면서, 같은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는, 가장 친한 사이. 나도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끔은,
아주 가끔은, 동생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동생에게 큰 조언을 해주거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토론할 정도로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입시에 시달리며 시간이 없었고, 대학생 되고 나서는 기숙사에만 있으니 본가로 가지 않아 만나기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러나 어쩔 때는 그냥 보이는 것만으로도 방향성을 찾을 때도 있는 것이다. 아니 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부모들은 보통 첫째에게 거는 기대가 훨씬 크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동생이 재수는 없긴 하지만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나에게 먼저 기대를 품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무대에 서는 가지고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7년 동안 발레리나를 전공까지 배웠다. 성악도 배웠었다. 나는 5살부터 발레 학원을 다니면서 마치 내 꿈이 발레리나인 것처럼 중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배웠다. 그저 촛대이지만 공연도 섰다. 커가면서 그 꿈은 내 꿈이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지만 만약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내가 하기도 싫은 발레를 평생 하거나 또는 도중에 포기하고 다른 꿈을 좇느라 뒤늦은 출발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나만의 신념과 가치관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고등학교, 대학교, 모든 시험, 자격증 같은 것들에 엄마는 동생을 대할 때보다 100배는 높은 기대감과 자신감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당연히 잘할 거라고.
당연히 해낼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만큼 내가 못 했을 때의 실망감은 동생에게 느끼는 것보다 100000배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호되게 나를 혼내셨던 걸까?
기대가 없었으면 실망도 없었을 텐데.
적당한 기대감과 적당한 실망감으로 나를 대해주길 바랐다.
성인이 된 후에,
지금은 동생의 입시도 끝날 쯤이다.
엄마가 나에게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동생한테 조언까지는 아니더라도 격려의 말이나 응원의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니?
이 시기에 가족들끼리 많이 틀어진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럴까 봐 두렵다. 지금이 바로 잡아야 할 때인 것 같아.
그래도 “누나”잖아. 응?
그래 맞다.
어쨌든 난 누나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동생도 사실은 동생만의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근데 엄마가 저 말을 할 때마다
그럼 나는?
같은 생각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장녀로서의 책임은 이렇다.
잘 형성된 가족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도 결국 후에는 나에게 동생을 챙겨야 하는 부담감을 주고 동생에게 엄마가 없으면 내가 엄마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시면서 사과하셨다.
엄마가 처음으로 초등학교 때의 나에게 대해서 사과하시던 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었다...
나도 몰랐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 책임이 많이 무거웠나 보다.
세상의 모든 장녀, 장남들은 이런 책임감을 조금씩이라도 가지고 살아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겠나. 내가 그렇게 태어난 걸.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생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누구보다도 기뻐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