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육아,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견딘다는 것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넘어져도 웃는 이유
4살 터울의 특전사 오빠가 있다. 나에게 핸드폰과 컴퓨터를 사주고, 때때로 용돈을 줄 만큼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다. 고민도 털어놓고 옷도 바꿔 입고 친구처럼 팔짱 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볼 때면 말이다. 언젠가부터 외로울 틈 없는 시끌벅적한 가족을 꿈꿨고 아들 둘, 딸 둘, 도합 네 명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임신기간 동안 입덧과 임신소양증, 시어머니의 암판정, 임신성 당뇨 위험, 조산기를 경험했다. '마음 편히 보낸 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싶다. 제발 아이만 건강히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아이를 출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태교다운 태교를 못한 탓인지 아이는 예민했고 잠도 없었다. 육아는 임신에 비하면 이제야 본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멀리 있는 엄마 찬스도, 시어머니의 암 투병으로 인한 남편의 부재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다. 몸은 힘들고 마음은 시시때때로 흔들렸으며 지독히도 외로웠다.
남편은 주말에 간병인 역할을 했다. 시어머니의 항암 과정과 합병증으로 인해 염증 수치가 올라갈 때는 덩달아 긴장했다. 불편한 잠자리도 견뎠고 무엇보다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마음 편히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과 매번 나만 독박 육아를 하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공존했다. 머리로는 시어머니께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한 걸 알지만 마음으로는 자꾸만 나와 아이가 뒷전이 된 것 같아 서운했다. 계속해서 우는 아이를 혼자 보는 것과 누군가 옆에 있는 날은 육아의 난이도가 하향 조절된다. 울면 번갈아 안아줄 수 있다는 것, 밥도 교대로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는 것, 1시간씩 교대로 낮잠도 잘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초보 엄마인 나는 아이의 울음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수수께끼를 풀 듯 울음의 원인을 찾아 헤맸다.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와 체온을 확인했다. 멈추지 않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이부터 안아 진정시켰다. 때마침 인터넷 카페에서 저녁마다 우는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마치 이웃들이 아이도 제대로 못 달래는 '무능한 엄마'로 볼까 봐 신경 쓰였다. 손목에는 손목 보호대가 어깨와 허리에는 파스를 도배하며 아이를 안고 업고 진땀을 뺐다. ‘잠투정이었구나’하고 안도하며 내려놓는 순간, 아이의 등 센서는 놓치지 않고 반응했다.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채 엎드려 자기도 하고 아기띠를 하며 아이를 안은 채 소파에 기대 쪽잠을 잤다. 그 결과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가 예쁠 수 있어?"라고 칭찬했다.
김치 3조각을 물에 말아 후루룩 먹을 때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 때도 아이와 나는 물아일체였다. 거울 앞에 덕지덕지 기름진 머리를 한, 잠도 못 자고 퀭한 나의 모습은 아이에게 내 인생 전부를 저당 잡힌 것 같았다. 억울하고 불편한 마음에 죄책감까지 더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줄 알았던 울음 소리는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아이 한 명도 이렇게 키우기 어려운데 아이 네 명을 낳겠다는 건 '비현실적인 희망 사항'인지 깨달았다. 결국 다둥이 엄마가 되고 싶다던 마음은 쏙 들어갔다.
소아과에 가려면 앞으로는 아이, 뒤로는 기저귀 가방이 나를 3인분으로 만들었다. 40분 이상 버스 타고서 진료를 보고나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이어폰 꽂고 노래를 들으며 덜컹거리는 소리 또한 좋았던 버스였다. 이젠 그 승차감이 더 이상 낭만이 아니었다. 장날에 타면 사람에 치이고 물건에 치여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예방접종은 많았고 소아과는 저출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이 넘쳐났다. 두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렸다. 몸이 힘드니 마음도 지쳐갔고 왜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지 이해갔다.
언론에선 어린이집 교사가 의사소통이 안 되는 어린 아동을 학대했다며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육아서마다 36개월까지는 무조건 아이의 부모가 키워야 정서적인 안정감과 애착 형성에 좋다고 했다. 선배 육아맘들은 "어린이집을 일찍 보내면 온갖 감기와 수족구 등에 걸려 병원 다니느라 바쁘다."고 난리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업주부인 나는 어린이집을 당연히 늦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일찍 보내야 아이가 사회성에 좋아 잘 적응한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엄마도 숨 쉴 시간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말과 "엄마와 질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늦게 어린이집을 보내겠다는 나의 소신은 상황에 따라, 조언에 따라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렸다.
첫째 때는 36개월을 채우고 4살에 어린이집을 갔다. 둘째 때는 엄마의 삶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26개월이 지난 3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갔다. 코로나로 인해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다른 반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는 문자가 날아올 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린이집에서도 맞벌이 가정이나 특별히 긴급 보육이 필요한 경우만 신청을 받아 갈 수 있었다. 보낼 명분도 사라졌다. 어린이집을 못 가고 지지고 볶고 싸우는 걸 바라보고 있노라면 코로나보다 이 상황이 더 무서웠다. 엄마의 삶도 중요하다던 나의 작은 결심과 외침은 코로나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도 이제 일상화되고 두 아이는 초등학생이 됐다. 아이를 키우는데 폭삭 늙어도 좋으니 ‘시간아 제발 빨리 좀 지나가라’며 외쳤던 주문이 이루어졌다. 하루하루는 그렇게 힘들고 더디 갔는데 이상하게도 10년이라는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엄마 손이 필요하고 흰머리가 늘어난 만큼 새로운 고민도 마주한비다.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공부도 좀 잘해 줬으면 좋겠고, 대인관계도 원만했으면 좋겠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꾸 욕심이 늘어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설거지나 청소를 도와주는 남편보다 ”오늘 하루 애썼어!“라는 한마디와 ”힘들었을 텐데 괜찮았어? “라는 안부가 더 고팠다. 아이와 고군분투했으니 왠지 하루 동안 힘들었음에 생색도 내고 싶고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었다. 남편은 나를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아이부터 안아보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집안일에도 아이에게도 남편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 같아 외롭고 심통이 났다. 남편도 퇴근하고 쉬지도 않고 도와줬는데 “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냐?”며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하루가 고단했던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나도 ”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도와줘서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를 놓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우리는 몸의 수고만큼 마음의 공감도 많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싸움이고 몸과 마음이 지치는 일인지 안다. 그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고 나니 아이가 얼마나 예쁜 존재고 행복과 감사의 통로인지 알게 됐다. 아이는 "엄마, 사랑해."라고 수없이 말한다. 매번 부족한 엄마인 것 같아 자책하고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도 "엄마도 우리에게 서툴러도 괜찮다고 했잖아. 엄마,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다독아다. 엄마가 되고 나니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고 매일 괜찮아지는 연습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성장해 가는 법을 배운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