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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소 Jul 19. 2024

뚱뚱한 길

"엄마, 바닥이 너무 뚱뚱해요."


우리 아파트는 평지에서 조금 위로 올라간 언덕 즈음에 있어서, 차를 탈 때는 모르겠지만 걸어 올라가면 경사가 조금 있는 편.

이제는 만 3살이 된 아가와 아래쪽 상가에 들렀다가 처음 걸어 올라가는 날에 들었던 말이다.


바닥이 뚱뚱하다니, 처음엔 또 무슨 기가 막힌 소리를 하나 다시 되물었다.


"라니야, 바닥이 뚱뚱한 게 무슨 말이야?"

"바닥이 뚱뚱해. 뚱뚱해서 라니 이렇게 걸어가는데 땀이 나잖아. 엄마 안아주세요."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는 동그란 언덕이 꼭 뚱뚱해진 길 같았나 보다.

순간 너무도 순수하고 재미있기까지 한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웃기던지, 갓 말을 배우고 아직도 안 되는 발음이 많은 이 친구가 하는 말에 도착할 때까지 웃었던 것 같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보다는 조금 더 컬러풀하고 낭만이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치킨 먹을 때나 마시는 콜라 한 모금도 반짝반짝한 별들처럼 느껴지는 게 참 예쁘다.(실제로, 갖은 애교 끝에 한 모금 얻어 마신 제로콜라 한입에 말씀하신 소감이었다. "엄마, 입안이 반짝반짝해요.")


하루하루 자라면서 더 많은 단어와 표현을 배우게 될 우리 아이, 앞으로는 조금 더 사실적이고 객관화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는 "엄마, 경사가 너무 높아요." "엄마, 산이 너무 가파르네요."와 같은 문장으로 이야기를 하겠지.

그래서 그런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총 동원해서 나오는 언어유희와 같은 말들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답다. 쓰는 사람에게는 이런 감성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친정엄마가 주신 사과 두 알이 있었다.

보통은 '빨갛게 익은 것을 보니 사과가 잘 익었겠구나. 많이 달콤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을 할 텐데,

아이는 보자마자 " 타요 색깔이네! 원숭이가 주면 좋아하겠다! 악어랑 코끼리랑 개미랑 또 나비랑 먹었었는데!(사과가 쿵!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그런데 선생님이 저번에 사과를 줬는데 나는 안 먹었어."와 같이 자기의 경험이나 본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더 예쁜 언어와 표현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예쁘고 멋진 단어를 알려주면 다음번에 그걸로 더 예쁜 말을 만들어서 말해준다.


부정적인 언어도 순화해서 말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또 이런 경우도 생긴다.

'이놈 아저씨' 혹은 '망태할아버지'를 다들 아실 것이다.

아이를 협박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어서 하면 안 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리미트가 없는 아이에게 리미트를 걸 수 있는 마지막 단어라 어쩔 수 없이 가끔 사용한다.

"라니야 지금 뛰면 밑에 이놈 아저씨 자고 있는데 깨잖아. 그럼 잡으러 온단말이야. 헉! 아저씨 올라오는 것 같은데!"

와 같이 이놈 아저씨를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쓸 때가 있다.(미안해요 아래층아저씨....) 뛰지 말라고 열 번을 말해도 안 듣던 아이가 이놈 아저씨가 온다 그러면 금세 앉아있는다.

얼마 전에는 가끔 나오는 그 '이놈 아저씨'가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엄마 나는 쑥쑥 자랄 거야. 아빠만큼 키가 커지면!"

"커지면?"

"이놈 아저씨 턱을 이렇게 문질러줄 거야!"

"?"

못 알아듣는 것 같은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턱을 문질문질 할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어디에선가 본 싸움 장면이, 턱을 문질러주는 것처럼 보였나... 

우리 부부는 집에서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폭력성이 있는 말을 하거나 다투지도 않는다.

때려줄 거야, 팰 거야, 죽일 거야 같은 워딩이 나오지 않는 것도 감사하지만, 턱을 문질러준다니ㅋㅋ

이놈 아저씨가 왠지 시원해하실 것 같은데....

앞으로도 최대한 부정적인 언어는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뚱뚱한 길을 시작으로 아이는 매일 새롭고 신선한 언어로 나를 유혹한다.

요즘은 고 쪼그만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제법 즐겁다. 그중에서 뚱뚱한 길은 내 기억 속에 아주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 

앞으로는 경사져서 힘들고 짜증 나던 그 길이, 오를 때마다 뚱뚱한 길이 떠올라 한 번씩 웃으며 걸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손 잡고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또 (아마도 자주) 짜증과 때를 써가며 우는 아이를 끄집고 걸어 올라가는 길이지만, 뚱뚱한 길이야 라니야!! 빨리 올라가 보자! 하고 짜증을 금세 잊게 만드는 길이 된 것 같아 오늘도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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