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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소 Jul 18. 2024

들키면 죽는다

한 톨의 소음도 없이 완벽하게 문을 닫는다.


결혼 전 즐겨 신었던 하이힐보다 더 높은 까치발로, 이미 푹신한 메트가 깔려있는 집안 곳곳을 소리 없이 다니는 스킬은 마스터한 지 오래.


치열했던 전쟁을 함께 겪은 전우는 휴대폰 속 소리 없는 반짝임에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조심스레 연다.


"띠리리링~띠링!!!!!"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우리 집 도어록 소리에 1차 경보가 울린다.


왜! 현관문 도어록 소리는 이다지도 커야만 하나...! 애꿎은 방문을 한 번, 그리고 죄 없는 전우를 한 번, 눈으로 불을 뿜고 다시 작전을 이어간다.


아직 그분을 영접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

냉장고 앞에서, 특수비밀 잠복요원  뺨치는 스텝으로 익숙하고 재빠르게 차갑고 그리운 캔맥주를 꺼낸다.


"쨍그랑..."


전우에서 갑자기 왼수가 된 놈이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제2차 경보가 발동된다.

본적 없고 들은 적 없는 눈빛과 표정의 무성언어로 신랄하게 욕을 하지만 상대방은 알아듣는 듯하다.



분명히 3차 경보가 울릴, 캔 따는 그 "치익-탁!" 소리.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아 하이힐을 신은 까치발이 바쁘게 작은방으로 들어간다.



두 놈을 모두 따버린 뒤, 드디어 알파벳이 적힌 작은 상 위에, 임무를 완료한 전우애 넘치는 둘이 마주 보고 앉는다.

 


주량이 맥주 한 캔이지만, 한 번에 반 캔을 목구멍으로 보낸다.


다리 한쪽을 잡고, 오늘 첫끼를 먹는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처럼 빠르고 깨끗하게 발골을 끝낸다.

물론 소리 없이.


어두워서 틀어놓은 티비는 아무 채널을 틀어놓은 소리 없는 화면임에도 이상하게 너무 재미있다.

홈쇼핑마저 재미있을 시간이다.

당연하다.


육퇴 후 몰래 먹는 치맥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애가 없는 사람도 거절 못할 육퇴 후 치맥, 게다가 아이와는 항상 삼삼한 후라이드만 먹어야 하지만 우리끼리는 무려 매운 양념치킨을 먹을 수 있다...!



짠도 필요 없고 할 수도 없지만 이미 내 마음속이 치얼스,올레,아리가또 이타다끼마스 ...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잘 보낸 서로를 격려하며 한 잔 적실 때 즘 들려온 울음소리.


"미아아아옹 애애애용."


왜 너희끼리 먹냐고 화라도 내는듯한 우리 집 고양님을 생각하지 못했다.


쉬이이잇 쉿쉿 ! 아무리 눈치를 줘도 간식을 당장 내놓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우리의 기싸움.

결국 아빠집사는 캔따개가 되러 부엌으로 다시 소환.



소환과 동시에 들려오는 3차 경보는 진또배기다.

올 것이 왔다. 우리 아들은 귀도 밝지 정말로...


바로 다시 재우러 들어가야 한다.

아직 맥주가 남았는데...

아직 치킨이 남았는데... 나는 들어가야 한다.

이번 쿠데타는 절반의 성공이지만 다음번엔 혁명으로 끝내리라 다짐하면서 토닥토닥 조그만 엉덩이를 두드린다.


누가 손은 눈 보다 빠르다던데, 술기운과 피곤함이 몰려오는 눈 깜빡임은 실제로도 손보다 느린 것 같다.


우리 아가는 잘 때는 정말 천사 같다.

천사 같지만 그래도 보고만 있어도 피로가 풀리지는 않아서, 옆에 반토막처럼 구부러져 누운 나는 곧 잠이 들 것 같다.

재우고 다시 나가려는 거창한 계획과는 달리, 반이나 남은 맥주와 다리와 날개만 먹은 치킨박스는 전우애 넘치는 배신자의 뱃속으로 사라지겠지.



잘자라 내 쪼고만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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