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를 알고 있다. 그는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대학교를 무려 두 곳이나 다니고 광고 쪽으로 진로를 펼치다 사회에서 튕겨져 나온 전형적인 루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친구다. 학자금 대출은 2000만원을 훨씬 초과, 극심한 서울 생활에 치여 결국엔 시골의 부모님 댁에 기생하며 은신의 삶을 보내고 있다. 이 친구의 꿈은 3D 아티스트,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신의 철학을 온라인 화폭에 담아 작품을 창조하려는 예술가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생계와 타협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불철주야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아 놓고는 생각에 빠진 채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이 친구와 나의 종착지는 같다. 그건 바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삶을 살아가려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꿈을 한 번 펼쳐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3D 아티스트로 성공해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목표다. 나는 글을 통해 내가 표현하려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친구와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전업'의 길을 포기하며 생계와 꿈,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글쓰기'의 과정을 '생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며 '꿈'을 위해 글을 쓴다. 반면 이 친구는 아니다. 수입이 없더라도 치열하게 3D 프로그램을 익혀 자신만의 작품을 내놓으려 하는 것에 집중한다. 당장의 먹고 살 생계보다 꿈을 실현시키는 몰입도가 중요한 것이다. 친구는 가족에 끼치는 당장의 민폐에 대해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며 더욱 더 악착같이 프로그램을 익히고 시간의 대부분을 3D 작업에 매진한다. 배수의 진을 거쳐 이미 스스로가 더 이상은 빠져나올 구멍이 없게 만든 다음 그 안의 고통을 참아가며 작업하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친구의 이런 모습을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애초에 조금만 양보하면 적당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하는지 말이다. 우린 아직 젊고 약간의 노동만 보탠다면 작업 기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마음은 편하지 않겠내고 여러 차례 설득해 봤다. 그러나 친구의 입장은 달랐다. 그것이 조급함인지, 무모함인지는 구분 짓지 못한 채 그는 본인이 원하는 것에 전부를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곧 생계로도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그는 반드시 생존해 프리랜서로서 이 업으로 생계를 꾸려보겠다고 갖은 고집을 부렸다.
비교해보면 노동을 통해 생계를 해결한 내가 이 친구보다 더 나은 형편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적당한 여유를 가진 채 글을 쓰는 것이 스트레스가 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안고 있는 결핍을 어쩌면 정편으로 돌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는 태도에서 나는 이미 스스로에게 '안 될 거야'라는 인식을 심어버렸을지도. 그건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끊어버린 단념에 불과하다.
시 또는 짧은 글을 통해 작품화를 해보겠다고 계획한지 벌서 2년이 넘었다. 아마 내년이면 3년을 넘길 것이다. 머릿속에는 가진 상상을 다 해 보는데 그걸 실현시킬 시간도, 에너지도 한참이 부족하다. 그 놈의 '생계 활동' 때문에 내 결과물은 도무지 밖을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늘 아쉽고 내 자신에게는 미안한 지점이다.
방구석에서 여전히 3D만을 붙잡고 있는 녀석을 응원한다. 충분한 몰입, 한적한 여유가 있어도 작품이란 것은 정말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 친구는 어쨌거나 가진 자원을 모두 할용해서 '작품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히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친구의 그런 무모함이 부럽다. 나도 스스로 한계를 긋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