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에 했던 첫 소개팅은 내 인생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흑역사 중 하나다. 제대로 된 표현 한 번 못해본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자존심도 땅바닥으로 추락한 찌질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0살의 첫 고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창피함을 지닌 이 소개팅썰을 여기서 한 번 풀어보겠다.
내 고향 친구 중에는 여자의 번호를 쉽게 수집하는 A라는 친구가 있었다. A는 뛰어난 말빨과 신체조건, 두뇌가 명석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솔로의 공백기가 없을 정도로 자주, 그리고 쉽게 이성을 갈아치우는 비범한 능력을 종종 선보이곤 했다. 한 번은 A의 여자 친구를 통해 나에게도 소개팅 자리가 들어왔다. 서로의 프로필을 나눈 후 나는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조금씩 썸을 가졌다. 메시지에 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는 걸 보면 제법 무난했던 것 같다. 문자로 인해 서로의 궁금증이 해소될 무렵, A는 본격적으로 2대 2 만남을 제안했다. 나는 당연히 하겠다고 했고 A는 소개팅을 위해 옷을 몇 벌 사는 것을 추천했다. 그렇게 어울릴법한(?) 자켓과 신발을 사고 더 나아가 머리도 한 번 손질하는 등 본격적인 만남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당일이 되었다. A가 차를 끌고 나를 태우러 왔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 어울리지도 않는 친구의 향수를 덕지 덕지 뿌려대며 첫 만남 장소였던 분식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 소개팅 녀를 보고 난 후의 내 얼굴엔 벌써 미소가 만개했다. 나는 이미 얼굴에서 모든 티를 들어냈고 이후의 소개팅은 그냥 적당히 무의미한 대화들만 가득 이어지고 있었다. 밥만 먹고 끝내기 아쉬운 눈치를 A에게 보내자 A는 우리에게 2차로 가볍게 술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그녀는 가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어필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문제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온갖 굴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술집에 오고 한 두 잔을 오갔을 무렵, A와 A의 여자친구, 소개팅녀를 모두 알고 있는 B(나와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로부터 연락이 왔다. A는 그냥 친구들끼리 술 한 잔 하고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며 B에게 잠깐 들리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B가 갑자기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고 이 때 분위기는 급격히 내가 소외당하는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B가 오고 어색하게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술자리는 그냥 친목자리로 변모됐다. B는 A와 A의 여자친구, 소개팅녀에게 쉴새 없이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끌었고 B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느 그냥 그 상황을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자리 내내 말을 아꼈던 소개팅녀도 B가 오니까 입이 트이면서 즐겁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여기에 B는 하필이면 여자친구가 없었다. 그는 A의 여자친구보단 내 소개팅녀에게 더 많은 대화를 하였고 그녀 역시 나보다는 B가 더 친했기에 쉽게 그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정말이지 여기서 나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을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어색한 웃음만을 지으며 술 잔만 들이켰다. 어느덧 B는 소개팅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나만 멀찍이 밀려나 버렸다. 그는 나도 아직 터치해 보지 않은 그녀의 손을 여러 차례 스쳐가며 보란 듯이 나를 말라 죽이고 있었다. 2차에서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관심 한 번 표현 해보지 못했다. 여전히 그녀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그녀는 이미 나에 대한 알아가기를 끝낸 듯 보였다. 우리 둘의 대화는 B가 온 이후부터 실종 되었다. 결말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그 때 나는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겼던 것 같다.
더욱 화가나는 건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게 사실 나 때문인 것 같다는 괴로움이었다. A는 도대체 얼마나 어색했으면 B를 부를 생각을 했으며 나는 얼마나 머저리 였길래 '남자다움'을 하나도 발산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 날을 위해 나름 한 껏 치장을 했건만 나는 다음 약속 한 번 제안해보지도 못한 채 그 날의 자리는 그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썸남에서 주변남이 되었던 감정은 정말 이건 뭐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더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썸녀의 머리를 만지고 손 터치를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은 정말 치욕이었다. 그들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술 잔만 퍼부었던 당시의 내가 참 밉지만.. 한편으론 가엾기도 하다.
으이구 등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