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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oana Oct 28. 2024

택배 한 달을 만근하기 까지

CFA 1차 시험을 보기 좋게 탈락하고 복학을 하기까지 한 달여의 시간이 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고민이 되었지만 더 중요한 건 이제는 스스로 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억눌렀다. 누나에게 진 빚(150만 원)도 이번 여름과 겨울 방학 통해서 갚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남은 기간을 잘 활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택한 알바는 지금도 모든 알바생들이 기피한다는 전설의 알바. 택배를 통해 한 달을 야무지게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택배의 장점은.. 흠.. 택배의 좋은 점은 말이지.. 까놓고 말해서 내가 택배를 택한 가장 확실한 이유는 당장에 가장 정직하면서도 확실한 돈벌이 수단이 이것 밖에 없어서였다. 복학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뿐더러 한 달 동안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이 택배가 유일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냥 머리를 좀 식히고 싶어서 였다. 이미 멘탈이 망가져 있었고 돈은 벌어야 했기에 막 귀찮게 머리 쓰면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밥이야 어차피 거기서 주니까 식대도 고민되지 않았고 버티면 180만 원이 나온다 하니 왠지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는 곳에서 통근 버스가 20분 거리 내외에 오는 것도 유리해 보였다. 지금의 나 같은 폐인(드러내지 않았을 뿐, 많이 심난한 상태였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택배가 유일해 보였다. 


마음을 먹고 지원을 하자니 솔직히 상·하차는 익히 들었던 터라 그것만큼은 피하려 했다. 적어도 한 달은 다닐텐데 일주일 다니고 골병이 들면 안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날씨마저 무더위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편해 보이는 곳을 샅샅이 뒤져가며 한 번에 내가 지원할 분야를 컨택했다. 그리하여 내가 맡은 업무는 '분배'업무. 통합 레일(?)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물량을 여러 군데의 터미널(바코드를 찍는)로 보내기 위해 기계가 아닌 손(!)으로 물량을 분배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곳에서는 큰 물건을 취급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2~3호 정도의 우편 박스만을 취급하다 보니 레일을 통해 오는 것들 위주로 작업한다. 그러나 이것도 우습게 보면 안 될 것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물량이 레일에 가득 쌓인다. 어느 순간에는 손으로 밀쳐가며 분배하는 것이 불가능 해질 정도다. 그럴 때는 레일에 끼인 물건들을 정신없이 퍼 나르고 인력 지원도 받으면서 어떻게든 레일이 정상 작동 하도록 만들어 놔야한다. 분류 업무의 상·하차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처음 분배 업무를 맡고 일주일은 견딜만 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물건이 쏟아지니 몸은 힘들어도 멘탈은 점차 회복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눈을 뜨고 바로 출근하는 모습이 반복되니 이제는 멘탈이 택배 때문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퇴근하고 또 그 날 저녁에 출근하는 삶(뭐... 어쩌다 보니 지금도 비슷한 삶을 산다). 심지어는

"내가 진짜 이번만 이렇게 일하고 다시는 여기서 한다"

를 매일 각오하며 이를 갈며 살았다. 퇴근 후 집에 와서는 그 마저도 돈을 아껴보겠다며 라면+밥 버거(당시에는 다 해서 3,500원 정도 했다)로 아침을 때우고 우울할 땐 거기에 술을 마시며 잠을 자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또 다른 폐인으로 볼 수도 있겠다. 주 6일 만근은 결코 쉽지 않았기에 정말 인생에서 악착같은 삶을 살았던 시절로 기억된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며 드디어 8월 마지막 날, 나는 결국 만근 보너스 175,000원을 포함, 총 180만원을 받고서야 택배 일을 종료했다.


힘들어 했음에도 그 때 내가 지옥같은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내가 속한 인력업체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신생업체였기에 관리하는 직원이 적고 열악했기에 용역 사장님은 우리 같은 용역들을 잘 대우해 주셨다.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하라 말하고 일하는 도중에는 틈틈히 우리들에게 마실 것, 먹을 것 등을 제공해 주셨다. 또 일이 끝나면 가끔씩 고기 회식도 시켜주시면서 우리들의 사기를 높이려 많은 노력을 애써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큰 텃세를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고 복학하고 나서도 나는 택배를 틈틈히 나가며 나름 생활비의 쏠쏠한 단비로 이용하였다. 


그렇게 개 처럼 번 돈으로 100만 원을 누나에게 갚고 나머지는 복학을 위한 생활비로 남겨놨다. 내 인생에서 참 뿌듯하고 대견했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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