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학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자로서 치열했던 마감을 거치고 금요일 밤을 허무하게 보낸 채 토요일을 맞았다. 오전 11시 레슨을 조금이라도 생산성 있게 만들려면 단 30분이라도 배웠던 곡을 복습한 채 가야 했다. 나는 두 번째 미션 곡인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어찌 어찌 연습하며 결국 15분 늦게 학원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늘지 않는 연습량에 늘 초조함은 묻어났지만 그래도 건반을 보며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게 마냥 행복했다. 선생님은 몇 달이 지났어도 내가 계이름 하나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는 것에 타박하지 않았다. 연습을 해오면 해온 대로 진도가 나가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거기에 맞게 진도를 나가주셨다.
레슨이 끝나고 악보를 보며 연습한 지 30분이 흘렀을까? 1시간 넘게 집중하며 신경을 쏟으니 더 이상의 연습은 힘들어 보였다. 로비에서 커피를 탄 후 쉬고 있는데 원장실로 한 아이가 들어갔다. 이윽고 그들의 대화가 이어졌는데 문 고리가 조금 열린 모양인지 말소리가 총총히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내용인 즉슨 학생이 피아노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 예술계통으로 진로를 쌓아 보고 싶어하는 고민 같아 보였다. 흔한 진로 상담?, 아니, 어쩌면 그 보다 훨씬 더 가벼운(5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수준의 상담이었지만 (나에게) 친절했던 선생님은 학생의 희망어린 바램을 되게 냉정하게 이야기해주셨다.
"그러려면 매일 하루 최소 3시간씩 연습해야 되고 주말에는 못해도 6시간씩은 피아노를 처야 돼. 예술을 진로로 삼는 다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야. 정 뜻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학원에서 한 달 동안 최소 2시간, 주말에는 4시간씩 치면서 너가 할 수 있는지 스스로 한 번 느껴봐"
대략 이 정도 수준의 조언이 학생에게 건네졌다. 피아노가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학생은 당장의 피아노 구매 상담도 했는데 그마저도 만류를 하며 연습을 먼저 선보이라며 다그쳤다. 자칫 하다간 또 다른 고물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해야지만 먹고사니즘이 해결되는 인생이 있고 못하는 것을 그저 즐겨도 만족할 수 있는 인생에서 나, 또는 (여러분들 포함)우리들은 어디쯤의 삶을 지향하는 것일까? 갑자기 피아노를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학원을 다니고 나서 거의 바로 피아노를 구입했는데 그 때 선생님은 나에게 흔쾌히 구매를 허락(?)해 주셨다. 어차피 연습을 하려면 집에 피아노가 있는 게 좋으니까 하면서 말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다할 구박이나 실력 부족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고 특별히 배워야 하는 메커니즘도 가르치지 않았다. 원하는 곡이 있으면 너무 어렵지 않은 수준에서 바로 칠 수 있게 해주셨고 건반을 치는 자세에 대해서도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그냥 나는 수강료를 내니까 거기에 맞는 수업 및 서비스를 받는 느낌 정도였달까? 그러나 열심히 해야 되고 또 잘해야 하는 저 학생에게 학원이라는 곳은 대체 무슨 존재로 다가왔을까? 나는 그저 비루한 실력임에도 박수 받으며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들어가면서 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기준이다. 나와는 달라 '잘해야 하는 삶'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인생이니 말이다. 취미가 전공이 되는 순간, 다가오는 마음의 부담은 취미를 직업으로 삼은 것만큼이나 어렵다. 모든 것에서, 전혀 다른 기준이 요구된다.
어쩌면 나도 전업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그것 때문에 포기했는지 모른다. 단지 생계 때문이 아닌, 그 부담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다. 어떻게 보면 취미의 양면성일지도 모르겠다. 취미로서 바라보면 접근 자체는 쉬울 수 있는데 '잘 해야 하는 삶'으로 목표를 바꾸는 순간 이것은 취미가 아닌 '훈련'이 된다. 그리고 그 훈련은 이제 매일 매일 반복된다. 사실 그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취미 활동에서 '자기만족'이라도 느껴가며 저 들의 삶에서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