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관리사를 준비하기로 마음 먹고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손을 벌려봤다. 당시에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부담으로 느껴졌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1학년 때도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를 지원 받아 생활을 했지만 그 땐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는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하게 들었다. 돈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면 결과물은 나와야 했고 택해야할 선택지는 합격 외엔 별 다를 게 없었다.
비록 고시에 준하는 비용은 아니었지만 접수비 7만원과 3~40만 원대에 달하는 인강비를 (모두) 지원 받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이 긁히는 문제로 다가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때는 스스로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것을(막대이나 보니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것도 순수한 생각이었겠지만 아무튼 당시 나는 이 시기부터 자립심이 강했고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느꼈다. 결과물로 보답하겠다는 열망에 나는 합격하면 오히려 더 큰 보상을 엄마에게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자격증에 대한 동기부여를 끝냈다.
수험 생활 초반에는 목표를 단순히 재경관리사 진도가 아닌 회계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했다. 회계 원리, 즉 내가 교양서에만 접했던 회계의 진정한 개념들이 단지 재경관리사 인강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무회계의 경우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CPA의 중급회계 인강과 같이 병행했다. 이를 통해 재경관리사 인강에서 계정 과목의 설명이 부실하면 중급회계에서 개념정리를 통해 이를 보충하곤 했다. 또한 초반부터는 지나치게 타이트한 일정을 잡지 않았다. 이왕 배우는 회계니까 폭 넓게 접하자는 의미에서 하루에 3강을 기본으로 보되(약 90여개 정도 되었다) 기간을 1월 말까지, 즉 넉넉 잡고 한 달 반 정도의 여유기간을 두었다. 이 안에서 누나와 함께 5박 7일 유럽 여행도 다녀오고 쌍거풀 수술도 같이 병행했다.
피 말라는 1회독이 끝나고 2월을 맞아 2회독을 할 차례였다. 그 동안 개념과 함께 교재의 연습 문제를 풀었지만 다시 돌아가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회계 과목의 휘발성이 이렇게 강한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또 돌아서면 까먹는 게 일상인 나날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2주 동안 2회독을 끝내니 이번엔 복학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친척 결혼식도 패스해 가며 공부에만 열중해 왔지만 복학의 초조함은 생각보다 거셌다. 시험까지 한 달여의 시간 앞에 복학 준비하랴, 기숙사 신청하랴, 흔들리는 멘탈 붙잡으랴 정신이 없었다. 그 후 3월 17일까지는 매일 매일을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반복인 삶이었다. 회독은 차례 차례 쌓여 어느 덧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시험 직전 마지막까지 결국 나는 '11회독'을 하며 교재 내용들을 씹어 먹을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은 (두근두근...) 합격!, 그 해에 가장 짜릿한 경험을 쟁취했다.
당시 내 멘탈을 가장 흔들었던 것은 물론 수험생활의 외로움도 있었겠지만 실패 시 느끼게 되는 무력감을 크게 두려워했다. 1년에 4번이나 볼 만큼 자주 있는 시험이었지만 정작 내가 또 한 번 볼 수 있는 여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학점도 신경써야 하고 대회활동 준비에, 생활비 마련까지... 한편으론(이게 속내이다).. 즐기고 싶은 갈증도 너무나 컸다. 이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다시 한 번 시험을 치러야 겠다는 자신이 없었다.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그냥 자기 위로나 해가면서 바닥인 멘탈을 다시 주워 담을 게 뻔한 시나리오 였다.
이런 상황에서 건진 합격이었으니 얼마나 간절했을까? 희망찬 성과로 4월의 포문을 열고 그 해는 내 전성기가 되길 기대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종종, 아니 자주 헛되이 무너지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