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한 달 동안 우리는 바빠서 연락을 주고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계획했던 날이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자 나는 그에게 연락해 어떻게 돼 가냐고 물었다. 호진이는 다른 급한 사정 때문에 일을 많이 하지 못했다며 날짜를 일주일만 더 미뤄달라고 했다. 순간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40만원이 그렇게 큰 돈도 아닌 거니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액수라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정확히 일주일의 시간을 준다며 그에게 경고 했고 일주일 뒤 그는 고작 10만원을 이체하며 미안하다고 지속적인 시간 연장을 부탁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친구에게 전화해 쌍욕 아닌 쌍욕을 마음껏 퍼부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딴 금액으로 친구 관계가 파멸적으로 가는 것도 어의없게 느껴졌다. 호의라고 베풀었던 도움이 호구가 되서 돌아오니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래 소리 지르며 당장이라도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렀다. 연락이 안 되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일주일마다 2만원씩 보내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하며 나를 살살 달랬다 그리고 실제로 일주일 뒤에는 2만원을 입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2~3주 뒤에는 그것마저 끊으며 순간적으로 잠수를 타버렸다.
친구의 만행에 참지 못한 나는 그의 부모님에게 알릴 요량으로 가족이 있는 집에 전화를 해 돈을 받아낼 계획을 세웠다. 전화를 걸자 (중년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고 당연히 그의 아버지라고 생각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말투와 나오는 대답이 영 아버지스러운 말투 같지가 않았다. 자식을 지나치게 옹호하며 되도 않는 핑계를 대는 것이 결국 호진이가 연기 했음이 분명했던 것이다(젠장할..). 나는 속았다는 것에 또 한 번 폭발하며 이번엔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경찰이란 소리에 민감해진 그는 이내 누그러지며 반드시 돈을 갚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돈이 들어오지 않자 다시 한 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쳤더니 이번엔 그냥 신고를 하란다. 나중에 재판에서 보자고 포기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우와), 정말 찾아가 패죽이고 싶었다.
나는 진짜로 돈을 못 받은 것을 고소하기 위해 파출소에 갔다. 어떻게든 그놈에게 법적 책임을 지워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내 사건을 뜨뜻미지근하게 다뤘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돌아온 나는 할 일도 많은데 이깟 사기 사건으로 삶이 휘둘리는 것에 엄청난 현타를 느끼고 말았다. 그냥 잊고 대신 반드시 이걸 교훈으로 삼자고 에둘러 다짐했다. 그렇게 어찌 어찌 잊아보려 했는데 그럼에도 40만원, 아니 계획했던 돈(비상금, 또는 생활비의 연장선으로 쓸 돈)이 사라지니 나 역시 금방 삶이 쪼그라들기 시작해 버렸다. 참.. 처한 현실에 허탈함을 느끼며 고민하던 중 결국 엄마 찬스를 한 번 만 더 쓰기로 마음 먹었다. 며칠 뒤 집에 가서 그간 겪은 마음고생을 쥐 죽은 듯 고백하며 생활비가 빵구 났으니 한 번만 보태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나름 내 인생에서 굴욕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사기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돌이켜보면 헤프닝으로 여길 만큼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당시 사정을 고려한다면 내 인생에서는 나름 진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돈은 애초에 빌려주는 것이 아니고 빌려줄 때는 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줘야 하는 구나.. 그리고 빌려주는 금액은 내 삶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액수여야 하는 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상식, 그러나 겪어봐야지 이 상식은 피부로 (real~하게) 새겨진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앞서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이 같은 부탁이 또 찾아올시 빌려주지 말고 차라리 맛있는 걸 사주자.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며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어찌보면 내가 빌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냥 밥이나 한 끼, 술이나 한 잔 사는 걸로 마무리 한다.
그래도 이 사건에서 나름 긍정적인 교훈을 찾자면 '신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는 돈을 빌려야 할 상황이 올 때 반드시 계획한 날짜에 갚는 것을 중요시 한다.
아니다. 그냥 돈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않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