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은 나에겐 지옥
한국에서 나의 요식업 아르바이트 경력은 대부분 ‘홀 서빙’이었다. 주방 보조라 해봤자 무거운 식자재 이동과 무한에 가까운 설거지의 연속이었기에 재료 손질, 조리 등 요리사의 영역에서 나는 무경력자라 할 수 있겠다.
독일 한식당, 그것도 조선족 사장 밑에 중국 주방장, 베트남 부주방장 그리고 나.
이런 재밌는 구조에선 주방 보조의 영역이 훨씬 넓었다.
총주방장은 웍만 잡았고, 베트남 녀석은 웍 조리를 제외한 타 요리를 한다. 결국 재료 손질은 전부 내 몫이었다.
그럼 사장은 뭐 하냐고? 그는 매일 담배 3갑을 태우며 한국 드라마, 중국 드라마를 섭렵하며 주방 뒤 조그마한 테라스에서 하루를 보낸다. 종종 마늘, 감자 껍질 정도는 까주더라.
초반에 사장이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그만두라고 얘기한 것도 이해가 간다. 당시 1인 평균 10유로를 내던 식당 하루 매출이 7-9천 유로였으니 손질할 재료는 언제나 산더미였고 그걸 내가 대부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일주일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건 소고기 100 kg, 돼지고기 100 kg, 닭고기 80 kg, 오징어 30kg 손질에 한식에 필요한 여러 가지 야채들.
주방 스킬이 전혀 없는 나에겐 매일이 웨이트 트레이닝 8시간 같았다.
반찬과 공깃밥이 무한 리필인 곳이어서 쏟아지는 반찬 그릇은 나의 설거지 레벨을 만렙으로 만들어주기 충분했다.
사장은 언어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업무에 들어가는 순간 퇴근까지 내 머릿속은 사장에 관한 욕만 가득 차있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원래 목적인 성악가의 꿈과는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고기를 썰 때면 반주만 나오는 음원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밖에 있던 사장이 드라마 소리가 안 들린다고 나보고 닥치랜다.
늘어야 하는 노래는 늘지 않고 재료 다듬는 속도만 늘어갔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버티니 3시간 걸리던 게 1시간으로 줄었다. 설거지는 누구보다 빨라졌고 식기 세척기만큼 깨끗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일이 손에 붙으니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다. 그러고는 옆에서 그들이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어떤 재료를 넣는지, 왜 그걸 넣는지 물어보면서 요리에 흥미가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오징어를 썰다가 왼쪽 엄지 끄트머리를 그대로 썰어버렸다.
머리가 띵 해지면서 많은 피를 쏟아냈다.
급하게 키친타월로 지혈을 하려 했지만 타월은 금세 빨갛게 젖었고 그렇게 타월 2통을 다 쓸 때쯤 사장이 나타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200유로를 꺼내 나에게 던져주며,
‘집에 가서 쉬어라’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지만 손가락을 썰었는데 고작 저 말을 들으니 속에서 울컥한 마음이 일며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한 달간 무급휴가를 받았다.
다행히 뼈까지 썰어버린 건 아니어서 상처 재생 연고를 꾸준히 바르니 손가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는 비싼 의료비를 자랑하는 독일 병원에 갈 돈이 없었기에 고작 연고로 재생한 나의 젊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나는 이 한 달간 쉬면서 노래 연습과 독어 공부를 집중했다. 계속 주방에 박혀 있다간 진짜 노래는커녕 학교 시험도 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일을 복귀할 수 있을 때쯤 나는 홀파트로 가고 싶다고 요청했고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주었다.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