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유실은 뒷좌석
나는 선을 지키는 여자. 워킹맘인 내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유일한 하나는 바로 수유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난 지 4개월. 세상에 나온 지 고작 4개월 밖에 안 된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기침이 심하다. 모두 다 잠든 새벽, 초보 엄마였던 난 이 작은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내달렸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당장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이라고 해야 할까. 전쟁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초보 엄마에게 아이가 아픈 건 전쟁보다 더 전쟁 같았다. 혹시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열이 내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초보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워킹 맘인 내가 일 때문에 아이에게 소홀히 한 게 있지나 않은 지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에게 독박 육아를 맡긴 채 홀로 싱가포르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 아빠에 대한 원망마저 밀려왔다. 나도 안다. 그건 남편의 일이고 회사로부터 주어진 좋은 기회라는 것을. 하지만 나 혼자 아이와 사투를 벌일 때면, 나 혼자 아이에 대한 걱정을 짊어질 때면, 나 혼자 눈물을 흘려야 할 때면 그렇게 남편이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결과에 대한 초조함과 불안함을 거쳐 나온 진단 결과는 폐렴. 추운 겨울 남편이 운동하는 서늘한 실내 농구장에 데리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따뜻하게 잘 감싸 안고 있으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만고 내 생각이었을 뿐, 4개월 된 아이에겐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초보 엄마였던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고작 4개월 된 아기를 집 근처 종합병원에 입원시켰다. 소아 청소년과 담당 과장님이 다가와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폐렴보다 아토피 치료가 더 시급합니다!”
“네? 아토피라뇨? 눈 주변이 원래 붉은 거뿐인데요?”
난 아토피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 태열이 있었죠? 그게 심해져서 아토피 증상이 얼굴과 손등에서도 나오는 거예요,”
선생님은 당장 아토피 치료가 시급하다며 프링글스 과자 통에 그물 스타킹을 씌워 아이의 양쪽 팔에 끼웠다.
그 광경을 보자, 난 너무 놀랐지만 아이가 긁지 않아야 상처가 호전된다고 해 입원 기간 동안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병원에 오기 전부터 아기띠를 하고 안고 있으면 아이가 내 가슴을 얼굴로 그렇게 비벼댔던 것이 생각나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제 겨우 100일 지난,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양팔을 고정해 둔 아이를 보며 마치 내 팔이 묶여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했다. 당분간은 아이를 업을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보통 마들은 출산 준비물에 유모차가 필수라는데 내 출산 준비물 목록에 그 흔한 유모차조차 없었다. 아니, 유모차를 살 돈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중고 마켓에서 저렴하게라도 구입했을 텐데 젊은 엄마였던 그때의 난 고가의 브랜드 육아 용품이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신중하고 또 신중하며 선뜻 구매를 못했다. 하지만 아이를 불편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3개월 할부로 겨우 유모차를 구입해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가 편하게 누워있도록 했다. 그리고 아이가 퇴원할 때쯤, 음식 알레르 결과표를 받은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유, 계란, 콩류, 메밀, 땅콩에서 모두 최고치인 5단계가 나왔다. 이건 100일도 안 된 아이가 모유 말고는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과 같았다.
장거리 출장을 가는 날은 영락없이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한다. 오늘은 남해 현장으로 출발하는 날. 이제 내가 선을 지키는 식사 시간 따윈 중요하지 않은 지 오래다. 오직 아이의 시간표에 맞춰 미팅 약속을 잡는다. 나는 이제 엄마로서 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선을 지키기로 했다.
“같이 바람도 쐴 겸 남해 갈이 갈래요?”
아직 아이가 어려 카시트에도 태울 수 없어 출장을 갈 때 부모님을 모시고 다녔다. 아니 부모님이 아이를 모시고 다녔다는 게 맞겠다. 미팅 시간은 보통 30분에서 1시간 남짓. 그 시간을 엄마 혼자 보내기엔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아빠까지 모시고 4명이 함께 출발했다.
이렇게 출발한 출장길은 평소보다 시간이 배는 더 걸린다. 왜냐하면 수유를 위해 거의 매 휴게소마다 차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휴게소에 세워 조금씩이라도 모유 수유를 해줘야 아이가 울지 않았다. 한동안 차만 타면 울어대던 아이였기에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 동안은 장거리 여행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휴게소에 도착하면 부모님들은 나와 아이의 편안한 수유를 위해 차에서 내려 몇 분간 휴게소 쇼핑 아닌 쇼핑을 하시곤 했다. 혹여 딸이 미안해할까 봐 매번 휴게소에서 산 물건을 마치 백화점 명품샵에서 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며 보여주시곤 했다.
얼마 전, 난 오랜만에 예전처럼 엄마를 모시고 출장길에 올랐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아이는 같이 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보조석에 탄 엄마는 어느새 70세가 훌쩍 넘어 주름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날도 예전처럼 휴게소마다 들렀다. 하지만 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엄마에게 “엄마! 사고 싶은 거 다 사! 내가 쏜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고 있는 나의 경제력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출장을 다니며 어려웠던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난 기분 좋게 원피스 두 벌과 스카프를 엄마에게 사줬다. 엄마는 이런 호강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겨우 3만원에, 그저 휴게소에서 산 옷에 깊은 주름을 집어넣으며 웃는 엄마를 보자, 엄마의 웃음은 내가 사 준 옷이 아니라 내가 이제 고생을 덜 하고 있어서 라는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엄마의 함박 웃음도 함께 차에 실어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한 10분 쯤 갔을까. 갑자기 원피스 한 벌이 없다며 엄마는 뒷석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피스는 보이지 않았다. 돈은 모두 계산했지만 많아진 주름만큼 기억력도 안 좋아진 엄마가 원피스 한 벌을 넣지 않은 것이었다. 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연신 내게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안해..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 미안해서 어쩌니...”
“엄마, 괜찮아! 택배로 받던지 좀 더 가면 돌아가는 길 나오는데 다시 가서 받아오면 돼.”
미안해하는 엄마를 보는 내가 더 미안해서 난 목소리에 힘을 한껏 주어 말했다.
엄마는 대체 뭐가 그리 미안할까. 독박 육아를 하는 나를 따라 사방팔방을 다녀주었고, 장장 15년을 내 아이를 비롯해 조카까지 봐주셨는데. 게다가 이렇게 다 큰 나 같은 못난 딸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데, 그리고 비싼 옷도 아닌 3만원치 옷을 사줬을 뿐인데. 엄마는 되려 나에게 폐만 끼친다며 ‘미안해’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아이를 키워보다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의 ‘미안해’에 담긴 의미를. 나 역시 어느새 중학생 딸에게 ‘미안해’라고 말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난 엄마에게 미안한 딸이자 딸에게 미안한 엄마가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엄마의 ‘미안해’라는 한 마디가 내 심장을 아린다.
엄마는 그런 존재이다. 자식에게 잘 해줘도 항상 미안하고, 못 해주면 종일 미안한 존재. 이제 엄마의 입에서 ‘미안해’라는 말보다 ‘행복해’라는 말만 나올 수 있도록, 내가 더 잘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