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아빠는 선장이셨다. 배를 타고 먼바다로 여러 달 나가 계시다가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집에는 고작 며칠만 머무르다 또다시 바다로 나가시곤 하셨다. 우리에게 아빠의 부재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아빠가 나무를 잔뜩 가져오시더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오랜만에 보는 낯선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이 좋았던지 그 모습을 옆에서 마냥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나무는 아빠의 힘찬 대패질에 동그란 대패밥을 빠르게 내뿜으며 깎여 나갔다. 직각자로 신중하게 재단을 하고 귀에 꽂아 두었던 몽당연필로 표시를 하고선 톱으로 나무들을 정확하게 잘라내셨다. 하루, 이틀.. 아빠의 작업은 계속되었고 날마다 아빠의 작업을 지켜보던 나도 어느새 아빠의 심부름을 하면서 한 팀이 되었다.
나무를 만지는 솜씨가 좋았던 아빠가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 낸 것은 책상이었다. 밥상을 펴놓고 공부를 해오던 5남매의 집에 드디어 책상이 생겼다. 아빠가 만든 책상은 상판에 다리만 있는 단순한 탁자가 아니었다. 책상 위에는 책을 꽂을 수 있게 책꽂이가 올려 있고 하나하나 나무로 깎아 만든 3개의 서랍이 있는 그럴듯한 책상이었다. 책상 표면은 사포로 잘 문질러 반들거렸고 그 위에 투명한 니스를 칠해 매끈하게 마무리하셨다. 아빠는 책상만큼이나 튼튼한 의자까지 만들어 주셨다.
도면 한 장 없이 머릿속으로 그려 아빠 손으로 만들어 낸 책상은 옆에서 내내 지켜봤음에도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만들어 낸 것처럼 신기했다. 그렇게 완성된 근사한 책상은 딸넷이 쓰는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큰언니부터 나까지 모두 한 책상에서 책을 읽고 숙제를 했다. 작은방 창문 아래 자리 잡았던 아빠의 책상은 5남매가 더 이상 책상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전 기억에서 아빠의 책상이 불현듯 소환된 건 우리 집 식탁의 거뭇거뭇한 손때를 보고서였다. 지금 살고 집으로 이사 오면서 넓은 식탁이 있었으면 싶었다. 가족이 둘러앉아 책도 보고 밥도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널따란 식탁이 갖고 싶었다. 이사비용도 만만치 않게 부담이었는데 헉 소리 나게 비싼 식탁 가격을 보고선 한번 만들어 볼까 싶었다. DIY 가구점을 찾아 원하는 사이즈의 식탁을 주문하자 사이즈대로 자른 나무들이 배달되어 왔다.
잘 잘려온 나무를 매끄럽게 사포질을 하고 식탁 다리를 나사로 조여 이어 붙이면 되는 단순한 작업만 하면 식탁이 완성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작업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사포로 문질러대도 표면의 거침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온종일 손에서 사포를 놓칠 못했고 니스를 고르게 칠하지 못해 얼룩덜룩 해져 몇 번의 사포질과 니스칠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매달려 만들어 낸 식탁을 사용한 지 5년이 넘어가고 있다. 모서리마다 손때가 묻어 원래의 색을 잃고 있었다. 식탁의 손때를 벗기고 싶어 하자 아이 아빠가 말했다. "난 그게 좋아. 니가 만든 식탁이 우리랑 같이 살면서 우리 손때가 묻은 걸 왜 없애. 이 안에 니 사랑이 담겨 있는 건데."
그 말은 잊고 있었던, 오래돼서 깊은 색으로 변한 아빠의 책상 앞으로 나를 데려다줬다. 아빠의 거친 손으로 뚝딱 만들어 냈던 책상은 마법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자식에게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투박한 아빠의 사랑표현이었다. 그걸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나의 손길로 식탁을 만들 때 가족이 함께 할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기쁨 때문에 고생스러움도 즐거웠다. 내가 품었던 마음을 아빠 또한 그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세상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의 책상에 담겨있는 깊은 사랑이 오늘의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어린 시절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고, 자존감 운운하는 말들에 기가 죽었다.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절망하게 만들었다. 생각을 바꿔 사랑받은 기억을 되찾기로 했다.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는 사랑받았던 과거의 나 덕분에 요즘 더없이 행복하다. 보물 찾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