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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소소 Sep 07. 2024

갓난 엄마

우리는 그 환자들을 산모라고 부른다.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리적으로 아이는 태어났지만, 엄마는 또 다른 영역에서 실제로 태어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때즈음 호르몬과 생각이 함께 작용해 우울감을 건너뛰기는 힘들다.


앞의 두 챕터를 읽어주셨다면 그 두 내용의 상호작용이 바로 산후 우울증 이라는 것을 알수도 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우리는 육아에 완벽히 무지하다.

둘째, 출산과 더불어 나 자신에 대한 역할인지가 바뀐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세번째, 그들은 환자인데도 불구하고 산모라고 불리운다.


산부인과는 병원이다. 임신과 출산을 위해 다니기만 한 사람이라면 의아할수도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산부인과는 산과와 부인과로 나뉜 두개의 과가 합쳐진 하나의 진료과 라는 뜻이다. 

물론 임신과 출산을 위해 다니는 우리에게 그곳은 병이 생겨서 다니는 병원은 아니었지만 난임으로 인해 다니게되면 확연히 병원이라는 인식이 들수있으며 자궁이나 유방을 관찰하려고 한다면 다시금 새롭게 느껴질 것인데, 이것을 다시한번 상기 시키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서다. 

아니면 너무나도 자만심이 컸지는 않았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지했던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산부인과를 드나들고 00엄마로 불리우며 출산후엔 당연히도 산모님으로 불리운다. 산부인과와 연결된 산후조리원이있다면 더더군다나 산부인과는 병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서비스업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은 병원이고 출산은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수술의 형식을 거쳐야 하며, 자연주의출산을 택하더라도 피할수없는것은 출산과 더불어 출혈이 있다는 것이며 출산을 위해 굳이 그럴 필요있는지 모르겠지만 손가락 발가락 뼈마디 까지 이완되기때문에 인간의 몸은 회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에 뒤따른다고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정신력 이라는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믿는 우리나라의 우리세대에게는 나약한 소리로들릴수 있을까. 몸이 아파지면 마음도 아파진다. 물론 앞뒤가 바뀌는것 또한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많이 양보해서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출산을 했다는 것은 몸이 약해져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수술과는 달리 출산만큼은 수술후 회복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여린 존재를 지켜야한다는 위기의식과 궁금증같은 것들에 휘말리게 된다.


수유콜에 응하지않고 잠만 잘수 있는가.

이제막 태어난 아이의 퉁퉁 부은 빨간 얼굴말고 말갛게 씻겨져 새근새근 자고있는 모습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뱃가죽은 아이만 쏙 빠지고 흐물거리는데 한시가 다르게 부풀어오르는 다리는 왜이렇게 아픈가. 코끼리가된 다리를 디디면 온몸에 구멍구멍으로 피가 터져나올것만 같아도 어떻게든 붓기를 빼고 걷는게 산모의 자세다.


자연분만인들은 동그란 방석을 들고, 제왕절게인들은 링거바퀴를 굴려가며, 앞섶을 풀어헤친체 인간의 존엄은 산모가 아닌 신생아에게만 있다는 듯이 초유를 먹이러 모여앉았다.

산모인 환자들이 모여앉아 아픈게 당연한 수술부위를 제외하고 가슴을 내어주며 새로운 고통에 맞닥들이게 되는 중이다.


정신과 육체가 연결되어있다고 가정했는가. 아마도 우리를 환자분이 아닌 산모님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이가 주는 행복감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의 범위는 줄어들 것이고 아기는 작은 체구의 모든 에너지를 빠는데쏟아내는데 첫 수유에 성공한 뒤로는 그저 이녀석이 뭔가 먹고 있다는것만으로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기가 그지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관절에는 힘이 하나도 없는 주제에 먹고살 힘 하나는 확실히 타고난다는 것이 경이롭다. 정신이 육체를 돕는게 아니면 무엇일까. 우리는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면서도 빠르게 회복해 나간다. 그렇다고 착각한다. 행복감과 알수없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들 사이에서 지쳐있는 몸은 적당히 무시하며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고 만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몰아친다. 아이는 짧게 자고, 조금씩 자주 먹으며, 우리는 기저귀도 혼자서는 갈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기엔 너무 어렵고, 가녀린 팔다리를 만지다 부숴트릴것만 같으며, 모로반사를 막아주는 속싸개는 여지없이 헐거워진다. 쉴틈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틈에서 배냇짓을 보며 심장이 뛰거나 잠든 눈이 몇초간 띄이기라도 하면 내가 앞으로 이 존재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겠구나 싶은 사명감이 생겨 버렸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리원에도 가기전에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들이다.

조만간 이것들은 서로 긴밀히 작용하여 우리 마음에 우울감으로 드러난다.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나의 길 앞에 아무것도 할수없는 무능력한 나 자신 뿐이다.

몸은 마음같이 움직일 수도없고, 또 제멋대로 작용하여 젖은 뭉치고 줄줄 흐르고 골반은 틀어지고 몸은 붓는다. 아이는 경이롭고 여리고 아리며 지켜내야만 한다는 사명감과 경이로움이 동시에 몰아친다.

밝은 빛은 좋지 않다. 아이에게도 산모에게도. 어두운 빛으로 우울감이 1 추가된다.

자극적인 맛은 불가능 하다. 회복중인 환자이므로. (이럴때만) 식욕감퇴로 우울감이 2 추가된다.

당연하게도 수유를 위해 순하고 영양좋은 미역국을 종류별로 먹게된다. 나의 용도가 정해져 있다는 일종의 존엄성 상실로 우울감이 3 추가된다.


그러다 어느순간 눈물이 줄줄 흐르고 만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다가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힘들었던 나의 유년시절이 스처 지나간다.

아이에게 일어날 많은 일들과 시련들이 떠오른다.


어쩌자고 아이를 낳았는가.




자신을 잃은날 찾아 읽기


의학적으로 산모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우울감을 경험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많은 정신없는 일들이 흐른뒤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야 흘린 눈물로 미루어 보건데

육아무능감과 그에비해 과중한 책임감, 산후조리를 위한 각종 자유의 부재가 우울감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나는 1월에 한번 10월에 한번 출산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가 첫째였는데, 바람이든다하며 창밖공기도 쐐지못하거나 손목이 시린다며 국끓일 냄비도 스스로 들지못하거나, 청소기조차 내맘데로 돌리지 못하는데서 오는 자유없음의 상황이 아주 크게작용했던것 같다. 어두운 조명과 짧은 해도 한몫 했으리라.


어른들 말씀이 늘상 옳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꼭 어르신이 아니더라도 한치앞을 먼저 지나간 선배의 말도 옳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건데 조금더 유도리 있던 나의 출산 동기들은 이다지도 우울하진 않았더랬다.


평소에도 감정을 중요시 하던 나였지만, 꼭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을까.

몇몇 공감이 어려운 부분도 있을수 있겠지마는.. 위로란 본래 필요없는곳 보다는 필요한 곳에 가 닿기만 하면 존재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른바 'F' 타입의 MBTI를 가졌다면 더더욱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본다.

오히려 그런 타입일 수록 쉬울수도있다. 수유를 위해 마시지 못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디카페인으로 미지근하게나마 얼음을 달그락 거려보라. 커피를 내린다는 행위만으로 일종의 해방감이 들수있다.

스스로 할수있는 무언가를 해보길 바란다. 책을 읽거나 동네를 산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거운 청소기대신 부직포가 달린 밀대라도 신나게 밀어보기를... 스스로 이불정리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자기효능감이 오른다는 이야기가 수두룩한데 콧방귀를 끼어보내지말고 밑져야 본전이니 꼭 해보기를...


슬프고 힘들었던 감정이 호르몬의 영향력을 벗어난순간 그렇지 않아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꼭 해야하는 걱정이고 언젠가는 맞닥들일 상황이 있다. 하지만 조금더 의연해지고 조금 덜 조급해 진다.

우울한 그때의 생각과 감정들이 틀린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 귀가 뚫리지 않은 아이를 재워두고 남편과 시끄러운 액션영화라도 한편보기를.


생각보다 아이는 스스로 자라난다.


엄마는 도와줄 뿐이었으니 우리 산모님들 스스로 환자임을 잊지말고 잘 보살피기를 바랄뿐이다.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태어난줄도 모르고 태어난 존재.

갓난 엄마.

모든 첫째의 첫 순간들은 모든 엄마에게도 첫 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의 중반쯤 부터 다시태어나 미묘하게 다시 살아 가게 된다.

아이의 모든 순간 경이롭듯이, 엄마의 모든 서투른 순간도 아름답고 값지다.


엄마로 사는 오늘, 아이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생에 한 가운데 반짝이에 아름다웠을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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