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전생으로 흘려보낼 자유로운 삶
아이가 없던 아가씨 시절엔 간혹 그것이 의아했다.
'왜 모든 아이엄마들은 인스타에 아이들 사진만을 올리고,
카톡 프사에 본인은 없으며
회사에 오면 왜 점심시간에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걸까.'
그 의아함을 한 바닥 일기에 적은 적이 있다.
육아일기를 들춰보느라 이전의 일기장도 함께 꺼내었더니 발견된 과거의 나.
아이를 낳기 전과 낳은 후의 삶은
전생과 현생처럼 서로 간의 연결고리가 희미하다.
분명 한 존재의 일생인데 그 기억도 어렴풋하고
생활양식은 180도 바뀌며, 중요하게 여기던 우선순위는 뒤죽박죽이 된다.
아이가 없던 시절의 일기에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이 한 바닥이었다면
지금 이 육아에세이를 쓰고 앉은 현생의 나는 그 시절 의아함을 이해하기 어렵다.
내 몸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듯이
내 마음속에도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서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탄생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 몸 안에 심장소리가 두 개다.'
그렇지만 난임 센터였다.
우리는 기쁨을 감췄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은 티 내도 되지 않았을까.
많은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쁨이 희망으로,
손톱자국이 수도 없이 할퀴어진 스마일 공처럼
버틸 힘이 되어주진 않았을까.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워서
햇살이 풀잎을 지나온 그림자를 즐기며, 한 손을 맞잡고 초음파 사진을 보다 떠올리는
6미리짜리 콩알의 우렁찬 심장소리.
아마 우리는 그날 부모로 다시 태어났는지 모른다.
홀가분하던 독립된 인생은 저 강 너머로 흘려보내고
전생의 기억쯤 희미해져도 좋다고,
6미리의 작은 심장고동을 꼭 지켜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