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짓는 주체이면서 내가 짓는 객체다. 주체인 동시에 객체로서 하나인 나, 인간이 본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외로운 존재인 것은 이 점에서 비롯된다. 자유롭기 때문에 외롭고, 외롭기 때문에 자유롭다.”
(홍세화 지음, 「결: 거침에 대하여」, 한겨레출판, 2020, 25쪽)
사람마다 인생이 각양각색인 데는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난 내 삶을 보더라도 스스로 한 수많은 선택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정답이 없고 오답이 없다. 내가 한 선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삶에서 내가 가진 것은 그저 선택할 자유뿐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잘 살아내고 싶을 터, 그러려면 ‘나’라는 집을 나답게 ‘지을’ 수 있도록 ‘선택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면 된다. 물론 그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안다. 내가 없는 세계는 내게 무용(無用)•무의미한 세계여서 나는 세계의 전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 속 일부로 엄연히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부정할 수도 없는, 그런 모순 속에 내가 있어서다. 내 세계를 내 마음대로 지으려고 세계 속에 있는 나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도 없는 처지다.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어찌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자유도 즐기고 외로움도 즐기는 게 상책(上策)이다. 외로움을 즐기기 어려우면 달래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또 다른 나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사회적 존재라는 최후의 무기를 사용하여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는 길도 있다. 묘한 것이 자발성에 기대어 하는 연대와 참여는 외로움만 달래주는 게 아니라 자유도 지켜준다는 점이다. 내가 이 순간 이렇게 쓰는 걸 멈추지 못하는 까닭이다.
ⓒ 정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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