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내와 나는 시골 생활을 꿈꿨었다. 아이들이 품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일주일에 사흘은 일산 아파트에서 나흘은 시골에서 사는 걸 갈망했다. 아니, 기회가 되면 아예 시골에 내려가 살자고도 했다. 17년 전, 어려운 살림에도 아내가 처형과 분담하여 가평의 어느 산비탈 땅을 샀던 이유다.
땅을 사자마자 꿈에 부풀어 임시거주용 컨테이너부터 넣어 주말이나 휴가 때도 머물 수 있게 했다. 자갈밭이었던 터라 돌멩이를 제거하는 데만 제법 긴 시간 애를 먹었다. 하지만 장작불 바비큐와 불멍 한 번으로 고단함이 사라졌다.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풀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까만 하늘에 박혀있는 수많은 별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있는 자갈밭 땅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여서 이래저래 바빴지만 처음 오 년 동안에는 틈만 나면 드나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느닷없이 내게 피부 알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햇볕에 오래 있거나 잡초 뽑는 일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피부에 탈이 났다. 햇볕에서 풀 뽑고 흙 파는 게 시골 일의 전부일 터인데 그걸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로 바람 쐬듯 들를 수 있을 뿐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식물을 좋아하는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 가꾸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처형네 마저 사는 곳에서 멀다 보니 발길을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어쩌다 들러보면 잡초와 칡이 주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허리디스크 파열로 삼 년 동안이나 발길을 끊은 적도 있었다. 허리가 좋아져 다시 가 보니 땅은 잡초밭 수준을 넘어 컨테이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피부에 덜 민감한 늦가을에 잡초와 잡목을 집중적으로 정리해야만 했다. 시골 땅을 산 것이 나에게는 분수에 맞지 않은 욕심이었던 셈이다.
엊그제 아내와 나는 간만에 가평 땅에 들렀다. 헤아려 보니 일 년 반만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운전하고 갈 때는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땅에는 잡초에 칡까지 이미 자리를 틀고 있었다. 나로서는 허리 조심에 더해 피부 알러지도 신경 써가며 잡초와 칡뿌리를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느린 데다 일머리마저 없어 한참을 했어도 정리한 티가 나지 않았다.
ⓒ 정승주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윗집 개 ‘가을’이 우리 냄새를 맡았는지 내려왔다. 웰시 코기 종인 ‘가을’은 짧은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갑게 달려와 아내에게 안겼다. 모양새가 눈물겨운(?) 이산가족 상봉 풍경 그 자체였다.
가평에 들를 때면 윗집 부부와 차 한잔을 하곤 해서 남편분께 연락했다. 부부는 조금 후 내려왔다. 여전히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담소를 나누다 남편분이 우리가 낫으로만 잡초와 칡을 제거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는지 도와주겠다 했다.
조금 후 남편분이 잡초정리 기계와 벌목 톱을 들고 나타났다. 그 많던 나무의 가지치기와 잡목 정리가 순식간에 끝났다. 하지만 개울가에 있는 굵은 잡목 하나를 자르려는데 이미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나무 틈새에 톱날이 박혀버렸다. 허리가 부실한 나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윗집 분은 홀로 한참을 씨름해야 했다. 너무 미안했다. 이래저래 우리 부부는 민폐 덩어리였다. 어찌어찌하다 톱이 빠져나왔고, 다행히 톱날도 망가지지 않았다. 그만해도 되는데 윗집 분은 다시 시도하여 끝내 마무리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했으나 급한 사정이 생겨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했다.
나는 잡초정리 기계를 써서 잡초를 베고 치웠다. 한 달이 걸려도 못할 일을 몇 시간 만에 해낸 데서 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사라지던 시골 생활에 대한 애착이 슬며시 다시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아내는 우리 땅에 자리를 튼 제법 많은 두릅나무를 보고 두릅 따러 조만간 또 오자 했다. 흙은 주인 탓을 하지 않고 그저 내주는구나 싶었다. 예정보다 한참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벌써 다리와 목 부위 피부가 발갛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시골살이가 분수에 맞는 건 아니지만 맛 정도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용기마저 솟게 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