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barcelona #3
땅이 울리는 듯한 함성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밖을 내다볼 순 없었지만 수백 명의 군중이 무리 지어 이동하고 있는 듯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어제 드래그 더 블루스 행사 측으로부터 메일을 받고 각오를 단단히 해둔 덕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메일 내용은 이렇다.
'대규모 시위가 있을 거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것과는 달리 안전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될 것이다. 우리도 모두 일하러 갈 거고 학생 들도 다 학교에 갈 것이다. 대중교통 이용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낮에는 한 시간에 4대, 밤에는 한 시간에 2대의 지하철만 다닐 것이다. 그것 외엔 걱정할 것이 없다. 집회가 있을 예정인 거리만 피해라.. 몇 개의 역은 정차하지 않을 수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까딸로냐 광장과 에스파냐 광장..'
에스파냐 광장?
눈을 비비고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숙소가 에스파냐 광장 바로 옆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프리 파티에서 만난 올가가 만일 대비해 이용할 수 있는 택시 앱(cabify)을 알려줬다. 그게 아니라도 바르셀로나는 택시비가 저렴한 편이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만약 너무 위험할 것 같다면 자기 집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이제 막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친절할 수 있는가 _ 춤에서 만났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나중에 들었는데 올가의 남자 친구가 곧 한국에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한국에서 올가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 이 글을 읽는 댄서 친구라면 모두가 알만한 그 사람! )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거리는 한산했다. 아침에 꿈을 꾼 것인가. 에스파냐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긴장감이 감돌기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온 아빠도 있었고 까딸로냐 독립을 상징하는 깃발을 몸에 두른 강아지를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까딸로냐 광장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가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라 본의 아니게 행렬을 따라가게 되었다.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바람이 좋아. 요트를 타려거든 5:30분까지 선착장으로 와. 오늘 큰 시위가 있을 예정이라니 서두르는 거 잊지 말고'
어제 그랬던 것처럼 까달로냐 광장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될 거라고 계산하고 까딸로냐역으로 내려갔다. 조금만 기다리면 기차가 도착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타야 할 열차는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들어오는 사람은 많은데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곧 역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그들이 내뿜는 열과 이산화탄소 덕분에 찜통에 들어온 듯 덥고 습해졌다. 산소가 모자란 듯 느껴졌다. 앉을 곳을 찾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십 대 아이들 몇이 바닥을 점거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열차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더 모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내 앞에 섰다. 답답했다. 거의 탈진할 지경이 되었을 때쯤 기다리던 열차가 들어왔다.
기차는 도시의 끝에 나를 내려줬다.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저 멀리 푸른색의 바다가 보였다.
오늘의 요트 투어 참여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몬트리올에서 온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와 캘거리에서 왔다는 커플, 미네소타에서 온 커플이 함께였다. 캐나다와 미국 북부에서 온 이들은 제일 먼저 그곳 날씨는 아직 괜찮은지로 대화를 시작하더라. 캐나다는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다고. 참가자가 모두 모이자 리카르도는 요트 내부를 구경시켜줬다. 화장실을 이용하고 물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를 알려줬는데 복잡해 보였기 때문에 되도록 이용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비상시에 쓰는 화장실 같았다. 닻을 올리고 드디어 출발! 항해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물살을 가르며 달릴 때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운이 좋으면 돌고래 때를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바다 수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바람을 맞는 순간 애당초 그 기대는 접었다. 바르셀로나 시내를 오른쪽으로 두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미 도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도 멀리 갈수록 더 조용해졌다. 농담을 주고받던 커플들도 어느 순간 대화를 멈췄다. 모두 숨죽여 붉은 물감을 풀어놓기 시작한 하늘을 지켜봤다. 도시 저 편에서 시작한 노을이 점점 넓게 퍼지고 있었다.
-저 쪽은 불이 난 것 같은데
리카르도가 도심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것이 도시를 불태울 듯 붉게 물들고 있는 노을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위의 메인 행사인 쓰레기 소각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이리라. 그것은 또 지금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겠지. 그런데 여기서는 노을이 힘이 더 셌다. 붉은 노을은 검은 연기를 집어삼키고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고 그래도 모자란 듯 우리가 있는 바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때의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땅 위에 있을 때 노을이 지켜보는 것이라면 바다 위에서 보는 노을은 풍덩 빠져보는 것이었다. 분홍색과 푸른색과 보라색과 주황색의 오묘한 색의 향연이 눈 앞에도 머리 위에도 발아래에도 펼쳐졌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숨을 멈추고 노을 속을 유영했다.
절정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정성을 들이더니 절정에서 결말로 이르는 것은 너무나 대충 치른다는 기분이었다. 좀 전 가지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던 축제의 장은 꿈이었다는 듯이 사방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요트는 선착장에 도착했고 함께 있던 무리는 재빨리 흩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
- 너희는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캘거리에서 온 커플이 미네소타에서 온 커플에게 물었다.
-타투를 하러 갈 거야.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인데?
-우리는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타투를 하나씩 남겨,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기념품인 셈이지.
나름 의미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춤을 추러 갈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미국에서 건너온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것이다. 다른 것도 여의치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 오래된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와 다르게 생겼지만 나와 닮은 면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이것이 나만의 기념품이다.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아... 그런데 사색에 잠겨 잠시 떨어져 걷는 사이에 이 사람들이 먼저 떠나 버리고 요트 선착장 문을 닫아 버렸다. 문을 여는 버튼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문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저 춤추러 가야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