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얼굴들이 가득한 월초의 초급반. 서로를 관찰하는 눈길에 조심스러움이 실리고, 묘한 긴장이 손끝에 달라붙어 있는 시기. 꽤 시간이 흘렀지만 운 좋게 지켜볼 수 있었던 몇 차례의 (남의) 로맨스가 있었다. 나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독수리 오형제가 지구 평화를 지키는 것보다 독수리 3호가 누구랑 사귀게 될지가 가장 궁금했던 로맨스 왕 떡잎이었다. 그중 살아 움직이는 남의 로맨스를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도파민이 터지는지.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던지는 시선, 허우적거리는 상대를 바라보는 눈길에 감출 수 없이 터져 나오던 애정, 이 애정이 주위의 경쟁자들에게서도 느껴질 때 비치던 당혹과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결의 같은 셈이 없는 순수한 감정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때면 가뜩이나 재밌는 수영이 열 배는 더 재밌어진다. 말하자면, '나는 풀(pool)로'를 직관하는 기분이랄까. 지금도 종종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면 마음 깊은 곳에 따듯한 물이 찰랑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지켜본 수영장의 로맨스들은 주로 새로운 얼굴들이 초급반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월초에 자주 발생했다. 이때 대부분이 초급이나 중급과 같은 비교적 레벨이 낮아 구성원의 변동이 잦고,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묘한 긴장감이 있는 반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락스 물에 면역이 생기지 않은 이 쭈뼛거리는 사람들 사이의 묘한 기류가 반갑다. 상대의 실수에 해사하게 웃고, 가까운 곳에 서고 싶어 하는 조바심이 예쁘다. 대화를 나누려 용기 내는 것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훗날 빛바랜 사랑의 기억으로 상처받게 될지라도 이끌림에 용감해지는 이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또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다만 아쉬운 것은 수영장에서의 로맨스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수영보다 더 재미난 것을 찾은 그들은 수영장을 홀연히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어떤 엔딩이 주어졌을지 알 수 없으므로 언제나 열린 결말로 그들을 응원하며 마음에서 떠나보낸다.
그런데 왜 이런 로맨스는 교정, 상급, 연수반과 같은 높은 레벨의 반에서는 일어나지 않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틈틈이 그 그룹의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깨닫게 되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이 초급, 중급일 때 이미 손잡고 떠날 사람은 다 떠났다는 것을. 내가 지켜본 남은 이들은 독야청청 수영하기 바쁘기에 로맨스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며, 거주지를 옮기는 이사나 구성원 간의 대판 싸움이 아니면 지각 변동이 거의 없는 수영장의 화석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 같은 반의 사람은 함께 운동하는 동지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경쟁 상대일 뿐, 로맨스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문득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이토록 대조적인 분위기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인간사 '다 때가 있다'라는 말에 격한 공감을 느낀다. 그나저나, 수영장을 홀연히 떠나간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 기왕이면 마음에 때가 앉을 겨를 없이 아름다운 날들을 만끽하며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