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전 새 학기, 월드 스타의 콘서트 티켓팅을 방불케하는 어린이 수영 교실 수강 신청에 성공했다. 어린이의 수영이라 하면 뙤약볕을 받아 따끈해진 한 자갈돌이 깔린 개울에서 여럿이 함께 개나 개구리 헤엄으로 지칭되는 묘한 포즈의 영법이 먼저 떠오르는 나는 일명, '촌년'이다.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하고 집 앞의 개울에서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등짝에 엄마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질 때까지 놀곤했다. 아이를 수영교실에 보내던 그 때쯤의 나는 어린시절 익힌 개헤엄은 자신 있었지만 수영의 네 가지 영법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왜 아이를 수영교실에 보내고 싶어한 걸까. 아이가 나처럼 족보 없는 수영이 아닌 멋진 영법을 구사하길 바라서 였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이를 수영교실에 보내게 된 이유는 아이가 멋진 수영을 할 줄 알기를 바라서도, 생존을 위한 기술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어릴적 작은 물고기를 잡으려 물 속을 누비고 다녔던, 낯빛이 창백해져갈 때쯤 따끈한 돌 위에 눕던 그 때의 느낌을 수영교실을 통해 아이에게 어렴풋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였던 것같다. 물 속을 유영하는 어린 시절의 감각을 마음의 바닥에 단단히 두고, 앞으로 살아갈 날동안 만나게 될 많은 물에서 가능성과 자유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초록이 시작되는 3월, 아이의 강습을 위해 수영장에 가게 되었다. 숨을 배우고, 발차기를 배우는 아이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 하던 한 달이 흐르고 그 풍경이 눈에 익을 때쯤부터, 자유수영 레인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들을 보고있으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지곤 했다. 하루씩 차츰 날이 따뜻해지면서는 나도 모르게 저 흐름 속에 나를 띄워놓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수영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수영 강습을 받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긴 고민을 했다. 한 달 쯤 뒤, "에라 모르겠다." 외치며 1일 이용권으로 수영장에 몸을 담근 지 보름 만에 월 이용을 신청했다. 어쭙 잖게 시작한 첫날, 25m 수영후 10분 걷기를 반복했다. 그 날을 떠올리면 제대로 걸어 나올 수 없었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처음 이용으로 헤매는데 20분, 풀에서 파닥파닥 20분, 씻고 나와서 주저앉아 20분. 수영장에 가기 시작한 지 두 달 무렵부터는 '유튜브'라는 21세기 최고의 스승을 만나 자유형과 배영을 익혔다.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느낌을 받고, 미묘하게 어제보다 더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아, 이 얼마 만에 주체적으로 느끼는 성취감과 고양감인가! 타고난 운동신경이 적잖이 섭섭한 내가 과연 죽기 전에 반려 운동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이처럼 즐거운 운동을 찾다니.
음~ 하아!
잘게 숨을 나눠 불어내고 강하고 깊게 숨을 들이기를 반복하며 양 팔을 교차로 돌린다. 죽을것처럼 숨이 밭아져가지만 죽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몸에서 신비를 느낀 지 1년. 그렇게 나는 수영을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고작 1년'을 수영하며 떠오른 감상을 쓰자니 귀가 붉어진다 하지만, 뭐 어떤가. 좋은 것을 좋다 말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과 함께한 시간과는 무관한 영역의 일이니, 아랑곳 않고 수영을 하며 느낀 기쁨과 회환과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 내 두 다리와 의지가 나를 지금처럼 꾸준히 수영장으로 데려다 놓아주길, 아주 깊이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