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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야 Oct 29. 2022

당신의 유산들

―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말이야”

이십 대 초반 여느 불안과 기대의 존재처럼 앞으로의 모습은 안개 속에 있었다. 흐르는 청계천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그녀 앞에서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난 그냥 공방 같은 걸 차리고 싶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보다 어른스럽고 현실적인 감각이 좋았던 그녀가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나중에 돈 벌어서도 할 수 있어. 우선 취업에 도움이 되는 걸 해.”

  

그 말을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귓가에서 쉬이 떠나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인문학과 학생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처럼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경제 과목을 복수전공으로 택하고, 이후에도 얼마간은 나 자신을 우선 구원하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을 하게 될 줄 알았다. 드디어 제 몫을 해보려는 사회 초년생이 당장 통장의 마이너스를 넘어 앞으로 얼마나 플러스할 수 있을지 셈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유연한 때라는 이유 하나는, 돈 받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게 제일 재밌는 일이라는 걸 시험할 여지를 허락했는지 모른다. 



국제개발 생태계가 나에게 단순한 ‘흥미 ’이상의 ‘의미’를 준 건 아마 내가 닮고 싶었던 한 교직원 선생님의 앞서간 발자취 때문이었다. 공공기관에서보다 NGO에서 인턴을 시작한 것도 이상하리만큼 확신에 찼던 권유에 이끌려서였다. 그래서인지 단기계약 무급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을 때 절실한 동시에 떳떳하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가끔 지칠 때면 나만의 공간을 운영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결정을 돌이킬 만큼 후회한 적은 없었다. 새로 열린 세계 안에서 스토리 라인 수정하기를 거듭하며 역경을 딛는 주인공 서사를 만드는 습관 덕분이거나, 아직 세계관 끝판왕에 가보지 못했다는 부족함의 인식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말이야.”


인턴 첫날 오리엔테이션 중 담당 팀장님이 기관의 미션과 비전 그리고 개인적인 사명까지 비장하게 나눠주시기 시작했다. 사적으로 의미 부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많은 국제기구나 정부 기관이 국제개발을 하는 목적은 외교와 국익을 위해서가 9할이고, 시민사회단체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외교와 사회정책 모두 고위급 정치에서 풀뿌리까지 다양한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으니 반드시 이원론적으로만 나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나라에 한해 국제개발은 외교와 국익을 위한 수단이자 언제 사그라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분야인 건 맞는 것 같다. 국제개발에 대한 철학과 장기적인 방향이 없다는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가 예나 지금이나 반복 재생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대선 전 국제개발 분야에서의 정당별 입장과 공약을 들어볼 수 있는 토론회가 있었다. 마치 우리 사회 다양한 의견의 축소판 같았다. 민관협력을 확대할 방법을 각 정당 대표 토론자에게 질문했을 때 ‘왜 해외를 도와야 하는지 국민의 공감을 얻도록 노력하라’라던 한 토론자의 말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실질적인 해외 원조가 1991년 시작되었다고 보면 지금까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해외 어려운 상황을 도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명을 하면 여전히 ‘국내 어려운 사람부터 도우라’라는 훈계 섞인 외침이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대다수 정치인이나 정책가들이 국제 이슈에 관심이 적어서 일지 아니면 국민들이 국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추자는 의견이어서 일지 아니면 둘 다 닭과 달걀 같은 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의 인식과 동의’는 늘 정책 결정자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온 것 같다. 해외 지원을 줄이면 그만큼 국내 소외된 사람들에게 지원할 자원을 보장할 수 있게 되는걸까? 오히려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감시하는 게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국내 국외가 아니라 한 사회가 빈곤과 배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는지에 대한 문제 아닐까.



한 사람은 자기 세계를 통해서만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게 가난은 오랜 시간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던 동시에 반드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생의 일부여온 가난을 생각하면 악착같이 나만의 부를 쌓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조금 덜 가져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세상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경험들이 쌓여가고 그 입장이 견고해져 갈수록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점점 더 듣기 어려워진다. 유연함을 잃고 확장을 거부하는 죽은 나무처럼 되어간다. 나만 잘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잘살자는 공동의 목적조차 확인하고 세우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린 승패의 토론 보다 더 큰 확장을 위한 살아있는 대화가 더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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