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억 속에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처갓집이 그립다
진실 씨는 사랑 씨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아꼈다. 너무나 좋아도 했다. 그러나 진실 씨가 사랑 씨의 어머님을 뵙고 나서는 달라졌다. 물론 사랑 씨가 첫 번째이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로망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장모님 아니 처갓집의 사랑이랄까?" 진실 씨는 처음으로 사랑 씨네 집에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방문을 했을 때 이미 많은 것들이 진실 씨 마음을 훔쳐가고 있음을 느끼고 말았다.
처갓집 사랑 씨네 집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너무나 순박했다. 본인도 시골 빈촌 출신인지라 집들이 그리 큰 마을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기 지역의 처마가 대체적으로 낮은 집보다는 처마가 좀 더 높고 마당도 넓은 그리고 지붕 있는 대문이 그리 많지 않은 집들만 많이 봐 왔었는데, 사랑 씨네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집은 연애시절 사랑 씨 집 근처 어느 여인숙 대문처럼 약간은 투박하면서도 정스러운 원목송판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대문은 궁궐에 들어가는 것처럼 별도의 지붕이 있어 약간은 웅장함마저 들었지만, 앙증맞게 귀여운 것이 위엄보다는 다정함이었다.
대문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면 좌우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좌측은 남쪽지방의 양반댁에 있는 문간방처럼 배치되어 있고 우측은 본체와 연결로 입구방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어서 주방 안방 거실 사이에 툇마루와 연결된 거실 겸 마루방 그리고 사랑 씨가 사용한 듯한 작은방 그리고 셋방과 셋방에 딸린 작은 부엌으로 구성된 진실 씨 눈에는 전형적인 경기식의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아담한 디긋자 집이 정감이 갔다.
그 디긋자 형태의 건물 안쪽에 중정과 비슷한 마당이 있는데 마당에는 사각형의 블록이 무질서하게 깔려 있는 모습이 저 서해안 바닷가 어느 염전에 깔려 있는 새금팔처럼 보여서 더 정감이 있었고, 마당 한쪽 구석에는 작은 수돗가가 있었는데 깊숙한 지하에서 품어 올리는 펌프물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수돗가 주변에는 봉숭아가 색색이 피어나 있고, 그리고 앞마당 모서리 수돗가부터 이어지는 뒤뜰 정원에는 철 따라 바뀌면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나무들이 여기저기 많이 심어져 잘 자라고 있었으며 그리고 불암산이 품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보니 뒤뜰 한편에는 커다란 바위가 흙에 묻혀서 얼굴만 삐꿈 내밀어 주어 따뜻한 봄날에는 거기에 앉아서 봄볕 맞이를 하면 좋을 것 같았고, 그 옆으로는 부추밭이 있어서 가끔은 싱싱한 부추전과 부추 무침, 가끔은 한쪽 구석에서 살며시 피어 오른 머위대를 꺾어서 데친 후 장모님 표 된장에 무쳐 먹는 다면 쌉싸름한 그 맛이 떨어졌던 밥 맛을 돌아오게 할 것 같았으며, 늦은 가을에는 아침 일찍 뒤뜰에 떨어진 쥐알밤을 주워서 아이들과 밤새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구워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울 것 같은 소박하고 아담하게 잘 가꿔진 집이 진실 씨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사랑 씨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무나 편하게 다가왔다.
언제 한 번은 젊은 혈기에 전날 만취한 관계로 배속이 아프다면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자 장모님께서 뒤뜰로 가시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야생초를 뜯어다가 정성 들여 맨손으로 즙을 내서 진실 씨한테 불쑥 내밀면서 약간의 얕은 미소와 함께 무뚝뚝한 말투로 "이거 몸에 좋은 거니까 남기지 말고 다 마셔" 하시면서 건네 주신 익모초 즙의 맛은 쌉싸름 하지만 달콤한, 잊을 수 없는 장모님의 손맛이었다.
거기에 아궁이 불로 지어서 해주시는 가마솥밥과 근처 배밭에서 손수 길러서 따다 묻혀 주시던 진실 씨는 처음으로 먹어 보는 비름나물등 수많은 나물들과 밑반찬, 그리고 고기를 먹는 것 보다도 더 영양가가 많아 자연스럽게 보신이 될 것 같은, 그 자연의 맛들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거기에는 싱싱한 산지 채소의 장점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장모님의 막내 사위를 생각하면서 만드신 정성과 손맛이 더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진실 씨는 그런 모습의 장모님과 사랑 씨가 자라 왔을 환경이 사랑 씨 보다도 솔직히 더 좋았고,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주말에 처가에 갔는데 툇마루에 걸터앉으셔서 맷돌로 손수 콩을 갈고 가스로 피우는 불보다는 장작으로 불을 피워서 콩물을 끓여야 더 맛있다면서 만들어 주시던 순두부와 콩물, 그리고 두부부침 두부찜 이것은 음식이 아닌 자연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최상의 환상 궁합이었다.
진실 씨가 처갓집을 사랑 씨 보다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장모님의 손맛과 그 집안에서 풍기는 고전적 아늑함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인자하시고 사욕이 전혀 보이지 않게 살아오신 연륜의 푸근함 등 그러한 수많은 보이지는 않지만 체감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사랑 씨가 첫번째겠지만...
그리고 신혼 초에 근처 농장에서 아침에 얻어 왔다면서 박카스 한 병과 함께 장인어른이 "남자한테 좋다네..." 하시면서 마시라고 거네 주신 빨간 피 한 사발, 물론 민간요법이거나 아님 범사에 떠도는 이야기겠지만, 장인어른이 주신 거라 거부도 못하고 억지로 눈을 감고 훌떡 마시지도 버리지도 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그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던 기억... 나중에 사슴피임을 알고 거꾸로 올라 올 뻔한 일 등...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해 보면 그 장인어른의 무관심 같지만 다정하시고 평범한 듯 무표정한 모습을 지으시던 장인어른의 작은사랑 표현을 느낀 이후로는 누구 한 사람 진실 씨한테 이런 음식을 권해준 사람도 없었고, 다시는 먹어 보지도 못한 그 추억 그리고 고마움 등등 이러한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작은 사랑들이 진실 씨 마음을 더욱더 그립게 옥죄여 왔다.
지민이 정민이가 태어날 때는 물론 행사 때마다 한 번도 놓지 질 않으시고 연로하신 몸으로 함께 해 주셨고, 특히나 백일과 돌 때마다 악귀를 쫓아내야 건강하게 자란다며 손수 붉은팥을 삶아 고물을 만들고 떡에 묻혀 만든 수수팥단자를 한 석작 싸들고, 따뜻할 때 손주에게 먹이겠다며 이른 새벽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해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사랑 씨네 집까지 달려오시던 모습은 잊히지가 않는다.
특히나 이 일은 진실 씨네 부모님들께서도 너무나 감사해하시는 일이 기도 했다. 진실 씨 고향이 저먼 남쪽인지라 마음만 있을 뿐 손주들을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 항상 아쉬워하시면서 마음의 빚으로 생각하시는 일을, 모두 장모님께서 잊지 않고 매번 다 챙겨 주시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또 애들은 얼마나 예뻐해 주시던지 친 손주 손녀들이 질투를 할 정도였다. 언젠가는 수돗가에 피어난 봉숭아가 예쁘다면서 정성 들여 예쁜 사기그릇에 담아 빠아서 백반을 섞어 지민이 정민이 그 어린 손가락에 비닐오로 꼭꼭 싸매 주시면서 "첫눈 올 때까지 예쁘게 간직해라!!!" 하시던 말씀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지금도 봉숭아 피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엊그제처럼 귓전을 맵 돈다.
그런데 그토록 정감 가는 처갓집도 영원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처럼 남에게 손끝만큼의 피해도 주시지 않고 본인들이 손해 보고 마시겠다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수많은 재산들을 장인어른의 형님과 약삭빠른 동생이 모조리 챙겨 갔어도 군소리 한마디 없이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시면서 오로지 자수성가로 집과 조금의 전답을 마련해 그것이 전부로 알고 열심히 살아오셨다.
그런데 고생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장모님께서 어느 날인가부터 시름시름하시더니 몸저 알아 누우셨다.
여태껏 장모님이 알아 누우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에 거동 자체가 불편할 정도로 아프시면서도 스스로 참아 가며, 배농사일은 물론이거니와 새벽에 쑥을 뜯어서 경동시장에 내다 파시는 일 등, 평생 하시던 일을 하나도 줄이지 않고 아픈 몸으로 지속하다 보니 더욱더 병세가 악화가 되어 몸져눕고 마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은 무리인 듯 집에서 옴짝달싹을 못 하신다는 전갈을 동네 친한 분의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부랴부랴 큰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머리에 종양이 있어서 그리 오래 사시진 못하실 것 같다는 비보였다.
사랑 씨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왔다.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고생만 시키다가 겨우 부모님 품을 벗어나 결혼을 했고 조금씩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고 있었서, 이제는 비록 작은 차지만 차도 한대 장만 했으니 운전 면허증도 따고 했기에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남들처럼 평생을 여행 한번 못하신 두 분을 모시고 여기저기 여행이며 친척집이며 모시고 다니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그 뜻을 펼치기도 전에 어머님은 기다려 주시 질 않는 다니...
아픈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오래 사시질 못했다. 처형집에는 한동안 가서 계시기도 했지만 사랑 씨네 집에는 어린애들한테 혹여나 전염된다며 지레짐작으로 우기시며 오래 계시질 않았고 단 한 루 인가 계셨던 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단 하룬가 이틀 모신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그때 비록 진실 씨의 작은 차였지만 그 차로 집으로 모셔다 드리러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가면서 예전에 사다 드린 적 있다는 사랑 씨의 말에 휘경동 근처 어느 호떡집에 들러 장모님이 좋아하신다는 호떡을 사드렸더니 맛있다고 드시면서 몇 번을 되네이시던 장모님의 모습...
그렇게 장모님과는 가슴에 간직한 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을 더 이상은 기록에 남기지 못하고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장모님과의 이별 후 홀로 남으신 장인어른은 큰 처남 네가 모시겠다며 왔다 갔다 하더니 장인 장모님이 평생을 고생해 일궈 놓으신 모든 재산이며 그 외 모든 것들을 홀로 계신 장인어른을 속닥여서 자기들 앞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 씨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 장소, 사랑 씨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고, 우리 아이들이 봉숭아 물을 들이던 그 장소에, 그 시절 처갓집은 사라져 버리고 현대식 3층 건물이 들어서고 말았다.
철 따라 피어나던 수돗가의 꽃들이며 뒷마당에 피어오르던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들도 남자한테 좋다고 해서 매번 처갓집에 올 때마다 베어서 묻혀 먹어도 금세 자라나던 부추도, 부추밭옆 큰 바위의자도, 밤알은 비록 작아 쥐알밤이라 하지만 가을이면 쏠쏠하게 열려서 장인어른이 주어서 모아 놓으시면 가을밤이 깊어 가도록 화롯불에 둘러앉아 구워 먹었던 뒤뜰 밤나무도, 맷돌에 갈아 손수 만들어 주시던 순두부를 만들던 툇마루 등등, 진실 씨와 사랑 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처갓집은 그렇게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진실 씨의 처거집은 장모님과의 이별이 찾아온 이후, 기억 속에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현실의 처갓집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큰처남 네가 처갓집을 현대식 3층 가옥으로 새롭게 지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장소는 그 현대식 건물마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종적마저 변형시켜 세워졌고, 처갓집은 물론 정감 있던 그 마을 아주머니들 마저도 한 명도 없이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 저 떠나면서 불암산이 가슴에 품었던 진실 씨의 처갓집 마을마저도 빌딩 숲 사이 어딘가로 사라저 버렸다.
사랑 씨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이고, 수없이 많이 드나들어 그 마을 지리에 빠삭하던 진실 씨마저도 지금은 장인 장모님이 잠들어 계시는 산소를 찾아가는 길마저도 헤메며 찾아 갈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