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식에 관하여
아홉 살, 자그마치 95개월이 된 아이와 여전히 함께 잠을 잔다. 감각이 예민하나 생활태도 및 마인드는 수더분한 아이라 육아의 대부분이 수월했다. 병원을 극도로 무서워해 코로나 기간 아이와 함께 보건소와 병원을 드나드는 일이 지금 생각하면 내 육아의 가장 큰 고비였을 정도로 의료진을 앞에 둔 아이를 달래는 일이 꽤 버거웠다. 그것 말고는 아이의 반응이나 태도로 인한 고역이나 고됨은 없었다. 순종적이고 얌전한 아이는 예민하고 차분한 엄마의 결에 조금씩 자신의 결을 맞추었고(그래, 아이가 맞춰준 것이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엄마인 나보다 더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해 주려 하는 마음 씀이 오롯이 느껴지는 아이로 자랐다.
일찍이 나와 떨어져 스스로 뭐든 잘 해내는 아이다. 일곱 살 때부터 학원이나 가까운 도서관은 혼자 드나들었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1~2시간 길게는 3~4시간도 거뜬히 기다려 주는 아이였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혼자 둬도 되냐 걱정할 정도였다. 혼자 둘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 나에게 있었고,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예상하는 범위 안에서는 나의 말을 십분 들어주고 그것을 지켜주는 아이였다. 기질이 씩씩해서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괜찮은 아이지만 단 하나 잠자리만은 예외였다.
아이가 백일을 넘길 무렵 우연히 '똑게 육아'라는 육아서를 읽고 어쭙잖게 시도했던 수면 분리는 수면은 둘째 치고 나의 멘탈을 박리했다. MBTI로 굳이 나누자면 전형의 J로 육아 또한 철저한 계획과 실행으로 무겁고도 무서운 시간들을 돌파해 나갔다. 육아의 어떤 지점에서 양육자로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땐 나의 믿음과 감 보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좀 더 실리를 두던 때였다. 수면 분리 또한 나의 선택이라기보다 그 지점에서의 과정으로 받아들였고, 과정을 수행하고 이뤄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단계였다. 반 평짜리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얼굴엔 얇은 가제 수건을 덮어 자는 시간임을 의식적으로 인지케 했다. 가슴께를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고, 혹여나 소음에 깰까 백색소음을 약하게 틀어 놓고 방을 나왔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서히 엄마의 부재를 느낀 아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급기야 거칠어지고, 몸을 틀고 틀어 자신이 거기 존재함을 끊임없이 알리는 아이는 이내 곧 자지러진다. 그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 귀를 통해서 보이는 느낌은 생소하고도 무서웠다. 괴로워하는 아이를, 그렇게 목 놓아 우는 아이를 그냥 두라고 했다. 그냥 두면 적응하고 혼자서 잠이 든다고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적응이 아니라 체념일 가능성이 높았고, 아무리 울부짖어도 오지 않는 엄마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아니었을까? '모든 아이는 다르다'라는 완벽한 명제를 초보 엄마였던 난, 매시 매 때 잊었고 또 몰랐다. 두어 번, 같은 방법을 시도했고 40여 분 정도가 지나 문을 열어 침대에 뉘여진 아이를 보면 얼굴 위에 올려 둔 가제수건이 다 젖어 있었고, 몸을 비틀어 생긴 생채기가 벌겋게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한결같이 나의 육아 방식을 지지해 주던 남편조차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조그만 아이를 안아들었고, 아이와 함께 방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뤄내지 못했다는 열패감과 꽤 많은 시간 아이에게 나의 수면을 저당잡히겠다는 허무함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어쭙잖은 시도여서였을까?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한 어설픈 도전이어서였을까? 그때 그 지점에서의 실패가 원인이었을까? 이후, 진정 수면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낱낱이 이야기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18킬로그램이라는 임신 중 체증 증가량이 아이 출생 후 1년도 채 안 돼 오롯이 다 감량되었고, 심지어 임신 전 무게보다 4킬로그램이 더 빠졌다. 74킬로그램에서 52킬로그램이 된 나는 그 체중 감량의 주된 요인은 바로 '수면 박탈'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거의 1년, 잠을 제대로 아니 거의 잘 수 없는 시간이 이어지자 전에 없던 쌍꺼풀이 생겼고 (이 쌍꺼풀은 아이가 태어난 지 8년이 지났는데도 안 없어진다) 초극도로 예민하고 또 성마른 엄마로 변해갔다. 원초적 본능만 남은 몸뚱어리는 기본적인 배출 욕구만 겨우겨우 해결하며 산송장처럼 생활했다. 어느 순간 아이가 잠을 자야 하는 순간 보다 깨어 있는 시간이 더 편안했고, 겨우 20분 자고 일어나는 아이를 재우려고 40분을 누워서 아이의 침구 역할(짓이기고, 타넘고, 올라타고)을 하는 것에 토악질이 나올 만큼 괴로웠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16개월 무렵 아이가 수십 분을 깜깜한 방에서 나의 몸을 타 넘으며 놀면서 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발딱 일어나 커튼을 거칠게 젖히고 토악질하듯 소리를 질렀다. "자지 마! 자지 마! 악! 그냥 자지 마!!!!!" 토해 낸 소리에 내가 놀랐고 이후의 감정이 처리가 안되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남은 토악질을 마저 해댔다. 악, 악, 악....
만 두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부러 낮잠을 재우지는 않았다. 피곤해 보이면 재웠지만 굳이 재워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밤잠을 길게 자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홉 살인 지금도 새벽 6시경에 일어나는 아일 보면, 얘는 정말 잠이 없는 아이다) 그리고 어쭙잖게 시도했던 개별 수면은 이후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아이와 뒹구는 시간들을 고역으로 느끼지 않게끔 잠자리 독서 시간을 길게 가졌다. 아이 책만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책도 읽었다. 참, 많이도 읽어줬다.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책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밤, 같은 방이어도 각자 침대와 매트에 나눠서 자자는 나의 말에 아이는 또 울상이 된다. 침대와 바닥의 매트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몸에 붙어 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옆에만 있으면 되는, 참으로 희한한 수면 버릇이지만 자신의 무게에서는 눌러지지 않는 매트 위 무게감에 덩달아 안도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숨과 숨이 섞여 탁한 공기에 익숙해져 헐빈하고도 가벼운 공기가 느껴지면 금세 눈치채고 일어나 엄마를 찾는 아이. 빈자리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잠이 깨는 아이다. 그 어떠한 이유건 나는 결코 알 수 없겠지만 95개월째 매일 서로의 숨과 숨을 섞으며 무겁고도 무거운 밤을 지워나가고 있다.
네가 잠이 들면 엄마는 침대로 올라갈게. 대신 네가 잠이 들때 까지는 엄마가 책을 읽어줄게. 아이는 금세 수긍하고 잠자코 눈을 감는다. 두어 장의 소설을 읽었을 무렵 아이는 '재미있다'라는 말을 건네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엄마는 책을 참 잘 읽어줘서 좋아. 엄마가 읽어주면 주인공의 감정이 다 느껴져서 너무 재미있어!"
책을 읽어주는 일은 그 시절 내가 무거운 밤을, 그 무게를 겨우겨우 버텨낸 방식이었고, 그런 나의 음성에 기대어 무거운 밤을, 새까만 밤을 하얗게 지워나간 아이는 마치, 너는 나의 엄마고 나는 너의 딸이라는 너무나도 환상적인 사실을 매 순간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균일해지면 나는 아직도 아이가 신생아 일 때처럼 숨죽여 몸을 일으킨다. 혹여 깰세라 숨을 참고 반동이 일까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일어나 침대 위로 슬며시 오른다. 고요히 자리를 잡으면 참았던 숨을 내쉬고 그 시절 잠든 아이 옆에서 늘 그랬듯 핸드폰 화면을 해제해 조명을 어둡게 한다. 자그마치 아홉 살이나 된 아이 옆에 자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아이의 밤은 그때와 전연 달라지지 않는다. 문득, 언제고 이 아이가 "혼자 잘래"라고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차라리 자지 말라며 악다구니를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때의 내가 애처롭지만 그때의 나에게 지금 나는 말해주고 싶다. "그럴 수도 있어. 암, 얼마든지. 절대 자책하지 마"라고. 지금 이 순간들이 언젠가의 나에겐 어떤 의미로 남을까?
"아쉬워하지 말고 많은 밤 아이와 나눠 마신 숨을, 그 숨소리를 기억하고 그 숨으로 남은 삶을 건강히 잘 살아내. 수많은 밤, 네가 지켜준 그 밤이 앞으로의 지아에게 든든한 방공호가 되어줄 테니 이젠 너의 밤에서 너를 지켜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