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변천사 - 공간에 관하여
티브이 없는 거실, 거실의 서재화, 책 읽는 가족. 한때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독서에 대한 전문가들의 조언에 너도 나도 거실에 커다란 책장을 맞춰 넣고는 있는 책 없는 책 가져다가 꽂아두는 일이 성행했다. 그래서 그 집 아이가 서울대학교를 갔다더라, 수능 시험이 몇 점이라더라... 마치 집에 책이 많으면, 혹은 집에 티브이가 없으면 더 혹은 '거실에' 책이 많이 꽂혀 있으면 아이는 자연스레 책을 본다더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생사 대부분이 그러하듯 한 밤중 골목 가로등 불빛에 기대 책을 보는 중국의 한 소년처럼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로든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전하고 따뜻하고 볼 거리가 많은 환경 속에서도 책등을 그저 책등으로만 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환경만 만든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 되겠다. 티브이가 켜져 있어도 펼친 책에서 눈을 못 떼는 아이가 있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책을 펼치고 앉았어도 자신은 책상 끝 모서리와 눈싸움을 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도 있다.
전자와 후자가 나뉘는 것에 비단 '거실에 비치된 책'이 전부일까? 무수한 전문가의 의견에 딴지를 거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실에서의 독서가 아이의 책 생활에 전부 혹은 대부분이 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무래도 티브이가 켜져 있으면 눈이 가기 마련이고, 영상과 볼륨 속에서 몰입해서 책을 읽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 아이는 거실에 티브이가 있어도 책을 볼 가능성이 크고, 책을 읽지 않는 아이는 거실에 티브이가 없어도 책을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거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또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돌돌 말려 있지만 언제고 기회가 되면 한칸 씩 풀어 이야기해 보겠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되어 거실 티브이를 없앴다. (방금 전까지 상관없다며?) 그간 티브이를 보는 공간으로 쓰는 거실이 육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필요해졌다. 어차피 보유한 책들은 '책방'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방 한 쪽 벽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우연찮게 얻은 아이의 보드북 전집은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 차곡 차곡 쌓아 두고 아이가 수시로 들어가 펼치곤 했다. 책을 읽는 공간이 확보된 상태에서 거실은 아이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연스레 아이의 공간이 되어가는 자리. 아이가 자라면서 차츰차츰 변화가 일어났다. 볼 풀장을 놓았다가 치우고, 커다란 미끄럼틀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촉감놀이를 하기 위해 김장매트를 펼치고, 흔들 말을 타고, 붕붕카를 몰고 거실 곳곳을 누비던 아이가 그것들과 이별하자 자연스럽게 아이의 책이 많아졌다. 그 책들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것에 거실이라는 공감은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3~4년을 온전히 아이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던 거실에 최근 변화가 찾아왔다. 아홉 살의 아이는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고, 단순하게 '책'으로만 접하던 세상이 화려한 영상으로 더 명징하고도 환상적이게 느껴졌다. 우연히 함께 본 여행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아이와 함께 곧잘 남편 방에서 티브이를 봤다.(그 전에도 봤지만 시간을 정해 놓고 보는 만화나 티브이 유튜브 방송이었다. 나와 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미디어 시간을 가진 것) 셋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만들어진 느낌이었고, 같은 화면을 보며 나누는 대화가 꽤 흥미롭고 신선했으며 즐거웠다. 하지만 피곤한 남편이 잠이 들거나 남편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아이와 더 이상 함께 티브이를 볼 수 없었고, 늦은 밤 모두가 잠든 후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영화를 휴대폰으로 보지 못한다) 남편이 자고 있으니 자유롭게 볼 수 없어 불편하던 찰나, 대대적인 결단을 내린다.
기존 티브이 보다 조금 작은 티브이를 새로 사 남편의 방에 넣어주고 기존의 티브이를 거실로 이동해 책과 티브이가 공존하는 거실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소파를 사이에 두고 한쪽 벽면에는 책들이, 반대쪽으로는 티브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아이는 티브이를 많이 볼까, 책을 많이 볼까?) 남편의 생활 패턴과 관계없이 아이와 자유롭게 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바로 '영화'보기 였다. 소싯적 할리우드 영화에 심취했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무수한 영화를 봤고, 티브이 드라마보다 토요명화나 시네마천국(EBS), 또는 일요일 오전 방영되던 '출발, 비디오 여행'을 티브이 앞에서 기다렸다가 보곤 했을 정도다. 말도 안 되게 좋은 영화들이 많았고, 아이와 함께 영화를 봐야지 하고 마음 먹으니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콩자반처럼 가뜩가뜩 들어찼다.
틈나는 대로 아이와 영화를 봤다. 아홉 살의 아이가 보기에 부담 없을 재난 영화에서부터 지브리 애니메이션, 해리 포터나 아바타 같은 판타지 영화, 독립운동이 소재인 영화나 스포츠 영화까지. 자막도 무리 없이 읽는 아이 덕분에 더빙판 상관없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영화 자체가 재미있다기 보다 아이와 함께 그것들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게 다가왔고, 가족이 모여 서로의 살을 부비며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얼마 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려고 검색을 했는데 시청연령이 15세로 표기되어 있었다. 재난 영화라 연령이 크게 상관있을까 싶어 재생시켰는데 영화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영상, 대사가 그리 곱지 않았다. 빠르게 정지 버튼을 누르고 남편과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데 (여보, 이 영화는 좀 아니지? 지아가 못 보겠지? 내용은 괜찮은데 조금 아쉽네 등등) 아이가 저 멀리 앉으며 말한다. "나이가 많이 없어서 미안해."
남편과 나는 박장대소를 했고, 위트 넘치는 한마디로 상황을 재미있게 마무리하는 아이의 촌철살인 한마디에 그 밤, 온 집안 구석구석 웃음과 행복이 연기처럼 퍼졌다. 대가 없이 먹는 나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나이. 세상사 대부분이 나이에 따라 달리 보이고 또 달라지는 걸 지금 아이는 알지 못한다. 다만, 엄마 아빠의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적은 자신의 나이가 한없이 비루해 보이겠지만 그 비루한 나이 속에서 엄마 아빠에게 줄 수 있는 생의 커다란 환희를 시나브로 안겨주고 있다는 걸 아이는 아마 모를 것이다. 미안할 게 없어서 나이를 미안해 하는 아이. 아홉 살, 아이의 모든 나이는 자신의 생애 한번 뿐이지만 앞으로의 무수한 나이 안에서 지금처럼 아름답고 또 아름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