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에 관하여
아이가 20개월이 되었을 무렵 자그마한 경차를 선물받았다. 20대에 면허를 따고도 내가 운전할 차도 없거니와 이따금 남편이 술을 마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따로 운전을 해 볼 일이 없었다. 그마저도 울며 겨자 먹기로 겨우겨우 차를 몰아 집에 가까워지면 환희의 눈물을 줄줄 흘리던 왕초보 운전이었다.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는 운전 또는 자가용의 필요성을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다. 결혼 전 부산에서 30여 년을 산 나는 대중교통이 땅끝까지 이어져 있는 살기 좋은 광역시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이동했고, 결혼 후 살림을 차린 지역은 마을버스와 콜택시를 적절히 이용하면 작은 도시 안을 아무런 불편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하니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담배 냄새가 밴 시트에 두부 같은 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시간은 말 그대로 고역인 택시,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유동하는 버스는 내 아이가 불편하다기 보다 아이로 인한 불편함이 초래될 까 선뜻 타기가 어려웠다. 비용이나 시간, 방법이나 걱정 어느 것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작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부터는 매일 같이 지역 공공도서관과 작은 도서관을 번질나게 드나들었고, 결정적으로 아이가 16개월 때 아기 띠를 배에 둘러 차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해운대 벡스코를 갔다. 앤서니 브라운 그림전이 전시된 벡스코 전시장에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그 장거리 외출은 거주 지역을 벗어나 병원 아닌 여가를 위한 아이와의 가장 먼 거리의 외출이었다. 그걸 실행하려 마음먹은, 전날 밤 산란했던 마음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다행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 장작 1시간 40분을 잠자코 앉아 있으면 벡스코 앞에 도착할 수 있는 버스였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여주기 전이라 그 긴 시간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온갖 걱정에 머리가 아팠다. 어느 순간 그런 걱정들이 하나씩 처치되며 저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온 문구는 바로 '다음 버스'였다. 내렸다가 다시 타면 되지, 안되면 돌아오면 되지. 그 생각들을 갑옷처럼 두르고 뛰쳐나오는 걱정과 불안을 하나 둘 베어냈다. 그날, 그러니까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전을 보고 그 조그만 아이가 로비 카페테리아에 앉아 우유를 먹던 장면은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체크 셔츠에 맨투맨 티를 덧 입혔고, 그레이 색 면바지에 같은 색 단화를 신겼던 아이의 옷과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도심의 인도 위를 팔딱거리며 뛰던 아이, 상가 쇼윈도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배시시 웃던 아이의 모든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왔다. 이 아이와 나는 못할 게 없고, 못 갈 곳이 없다는. 육아에 있어 실로 어마어마한 자신감이었다. 그런 자신감이 뭉쳐 육아가 막 즐거워지려던 찰나, 작은 형부가 선뜻 새 차를 선물해 준 것이다. (작은 형부는 자동차 관련 회사에서 근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번쩍이는 새 차가 아파트 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차 키를 건네준 직원은 "안전 운전하십시오"라는 말을 뒤로하고 멀어졌다. 한동안 그 차를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나?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두려움과 설렘이 골고루 섞인 달뜨고도 긴장된 마음이었으리라. 여기저기 살펴보고 이것저것 만져보고 한참을 구경 할 법도 한데 새것에는 심드렁 한, 어찌 보면 새것에 즐거워하는 나를 경멸하고 검열하듯 애써 모른체하고는 후다닥 집으로 올라왔다. 해가 질 무렵, 그래도 첫 찬데 시운전이라도 해보라는 남편의 권유에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차에 올랐다. 어디 갈 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동네 어귀를 한 바퀴 돌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긴장한 마음에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 엄마가 운전이 처음이라 너무 떨려. 아무래도 네가 하는 말을 운전하는 동안은 잘 못 들을 것 같아.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차가 멈췄을 때 이야기해줘!" 이 말은 후로도 한참 동안 시동을 걸며 아이에게 수십 번은 한 말이다. 그때 아이는 대답을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아이도 능히 짐작했으리라. 엄마의 뒷모습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엄마의 감정을 아이도 십분 느꼈으리라.
한적한 동네라 어렵지 않게 시운전을 하고,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노오란 하늘빛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아오니 사위가 깜깜했다. 후면 주차를 위해 천천히 차를 들이 미는데 느낌이 싸하다. 생각했던 각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과 핸들을 얼마큼 돌려야 하는지 한순간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 순간은 찰나였지만 지금도 명징하게 기억나는 건 손과 발의 부조화였다. 내가 움직이려는 방향과 손놀림, 발 놀림이 한순간 실타래처럼 얽혔고, 어느 순간 더 이상 발을 뗄 수도 핸들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을 때는 어느새 바로 옆 검은색 SUV 조수석 문과 나의 차 운전석 문이 쪽 하고 뽀뽀를 하고 있었다. 숨만 내쉬어도 차가 움직일 것 같았고 0.01mm만 움직여도 저 차에 키스마크를 낼 것 같았다. 빼지도 들이밀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 말로만 듣던 오금이 저렸다. 그렇게 얼마간 울지도 못하고 숨만 겨우 내뱉고 앉아서는 등줄기에 땀만 줄줄 흘렸다. 엄마가 운전석에 앉으면 말을 삼갔으면 한다는 나의 말에 아이는 정말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건 그 후로도 나를 위한 철저한 배려였고, 그런 아이였기에 그렇게도 오랫동안 많은 곳을 오다닐 수 있었다. 각설하고 그 순간 아이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엄마?"
그제야 벙쪘던 나를 알아채고는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어, 어 그래. 어, 근데 어쩌지. 엄마 아무래도 큰일을 친 것 같아. 어떡하지?" 아이에게 하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잣말도 아닌 완전한 말 같지도 않은 말과 중얼거림이 뒤섞여 정확한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 순간이 연기처럼 팡! 하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잠시 후 아이는 말했다. "엄마, 괜찮아. 침착해."
그때 아이는 겨우 20개월, 두 돌이 안 지난 꼬꼬마가 나를 위로했다. 그제야 룸미러로 고갤 들어 아이를 살폈다. 카시트에서 등을 세우고 깜깜한 뒷좌석에서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봇물 터지듯 눈물이 터졌고 못난 엄마를 위로해 주는 작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울음이 터진 나를 보고 아이는 더더욱 간절하게 "엄마,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를 쉬지 않고 내뱉었다.
잠시 후,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던 1층 주민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고, 큰 소리로 아주머니를 불렀다. "도와주세요." 아주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며 지나가던 옆 동 아저씨 한 분을 데리고 왔고, 퇴근길 집으로 들어가던 아저씨는 선뜻 가까이 다가와 나의 핸들을 직접 끝까지 돌리고는 이제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된다고 얘기해주었다. 서서히 떨어지는 차체, 깜깜한 주차장이라 아저씨는 자신의 핸드폰 조명을 켜 곳곳을 비춰주었고, 뒤에 아이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흠칫 놀라며 "아기가 많이 놀랐겠어요. 아휴, 어서 내려서 아기 안아주세요."라고 말했다. 주차를 하고 검은색 SUV를 살폈다. 도움을 주셨던 아저씨는 키스 마크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상대 차주에게는 연락을 해주어야 한다며 그게 예의라고 하셨다. 사고라면 첫 사고인 순간, 제대로 된 어른이자 선배가 건넨 조언이 지금도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행히 상대편 차주는 정말이지 쿨하게 되려 나를 걱정해 주었고,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어서 올라가서 아이를 달래 주라며 나의 등을 따뜻하게 밀어 주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그 모든 순간에 나의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는 사실. 1층 이모님도 106동 아저씨도, 8층 차주분도 모두 그런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고, 이렇게 배우는 거라고 어서 올라가 쉬라며 따뜻한 말들을 건네주었다.
정작 집으로 들어온 아이는 참았던 눈물을 왕 터뜨렸다. 얼마나 참고 참았을지 능히 짐작도 되고 그 울음소리가 하도 구슬퍼 덩달아 나도 울어버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벼운 일일 수 있다. 또 키스마크를 냈더라도 적절한 방법에 따라 보상을 하면 될 일이고, 살아가다 보면 아니 운전을 하다 보면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초보 운전자 아닌가. 처음 차를 산 날 첫 시운전에서 당연히 차체나 거리감이 없었을 것이다. 한 번의 작은 실수일 뿐인데 그 작은 일에도 팔딱 거린 내가 못내 못나 보이지만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 나의 작은 아이가 건넨 그 한마디는 앞으로 더 큰일이 닥쳐 온대도 나를 지켜줄 말이었다.
며칠 전, 아이와 함께 종이를 코팅해 자르고 있었는데 실수로 그어진 선을 벗어나 반듯하게 잘라내지 못했다. 중요한 그림이라 실수가 치명적이었는데 순간 멈칫하고는 콧구멍에 힘이 들어가려는데 아이가 나와 종이를 번갈아 보더니 다급히 내뱉은 말, "엄마, 괜찮아. 그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우리 둘이서 가지고 놀 건데 상관없어. 괜찮아." 무심히 내뱉은 말이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게 했고, 무수한 순간 속 아이가 나에게 보낸 "괜찮아"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못난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일으켜 주었다. 그 일으킴으로 부족하고 서툴렀던 내가 어엿한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우린 늘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만 떠올리지만 실상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것이 몇 곱절은 더 많다는 걸 자꾸만 잊는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좋은 사람, 필요한 사람,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준 존재. 바로 아이들이다. 무심히 내뱉는 말들이 쌓이고 쌓여 아이와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면 지금 내가 내뱉는 말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느니, 가정교육이라느니 따위의 말들에 반감이 많지만 이것 하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아이가 내뱉는 많은 말들은 본인이 들었던 많은 말들이라는 것. 그 많은 말들 중 자신의 마음에 켜켜이 쌓아두었다가 적절한 순간 내뱉어 내는 아이들의 말은 결국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아이에게 건넸을 "괜찮아" 한 마디가 되돌아와 나에게 안길 땐 그저 "괜찮아"일 수 없다. 괜찮지 않은 모든 것들이 다 괜찮아지는 아이의 한마디에 앞으로의 내 삶이 괜찮을 거라는 안도와 작고 작은 희망을 덥석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