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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찌개 냄새는 배관을 타고

내가 살았던 집_23

by plan B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처음 자취를 하게 되었고, 밥솥에 밥 하나도 짓지 못하던 아이가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요리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혼자 먹을 수 있을 수준의 요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엄마가 해주는 그런 깊은 맛은 나지 않는다. 가끔 엄마가 올라올 때면 가장 먼저 해 주는 요리가 방앗잎이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였다. 분명 조미료도 재료도 자취방 냉장고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들었는데, 엄마의 손길이 다은 순간 다른 차원의 요리가 되었다. 자취생활이 오래될수록 요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배달의 민족답게 웬만한 건 다 배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엄마의 맛을 재현할 수가 없어서 이기도 했다. 그 생활에 나름 만족하며 살아갔지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가 해 주었던 그 맛이 더 생각났다. 특히, 엄마의 요리가 땡기는 날이 있었는데, 1층 할머니 집의 아침밥 냄새가 올라올 때였다.


오래된 구축 빌라여서 그런지 옥상 배관이 시원찮아서인지, 1층 할머니가 요리를 할 때면 3층인 우리 집까지 그 냄새가 올라와서는 방안 가득 배였다. 특히, 배관바로 옆에 있었던 침실의 베개와 이불까지 그 향기가 배여 든 듯했다. 프리랜서 밤낮이 일정하지 않았다. 북향이었던 작은 방을 침실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암막커튼까지 치면 작은 방은 완벽하게 어둠의 세계가 되었다. 그 어둠의 세계를 1층 할머니의 된장찌개 냄새가 매일 침범해 왔다. 꿈속까지 그 냄새가 침범하는 듯했다.


1층 할머니네는 할머니 내외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드님이 같이 사시는 듯했다. 빌라의 다른 층의 사람들과는 거의 부딪힌 적이 없었는데 유독 1층 할머니와는 나갈 때마다 부딪혔다. 각층에 한집만 살았기에 총 4세대가 사는 빌라였다. 지하와 2층은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할머니만이 그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이사 들어가는 날 처음 문을 두드린 것도 1층 할머니였다. 관리비가 없는 건물이라 각층에서 알아서 청소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할머니가 혼자 계단 청소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며 당연한 듯이 나에게 청소를 요구했다. 달에 한 번씩 밀대로 닦으며 된다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뭔가 모르게 심통이 났다. 그냥 관리비를 주는 게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이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내가 만만해서 시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4년을 살면서 다른 층에서 청소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약간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현관문 밖에서 할머니가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사 온 그 해의 여름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배관에 금이 가 있어 침실 옆 벽으로 물이 들이닥쳤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옥상의 방수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고, 층마다 집주인이 다르던 집의 주인들을 설득하여 옥상방수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기 위해 옥상에 있던 1층 할머니의 텃밭을 정리해야 했다. 옥상에는 토마토며 고추며 오이며 정원을 이루고 있었다. 난 당연히 1층 할머니가 관리하는 곳이라 생각했었는데, 할머니는 자신들이 살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며 자신은 이용만 했다고 했지만 집주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할머니도 우리와 같은 세입자였다는 것을. 사실 할머니가 관리하지 않았다면 이 빌라는 더 엉망이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을 보고 난 당연히 할머니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가족은 집주인의 요청으로 옥상의 그 많던 흙을 치웠다. 얼마 후 옥상 방수 공사가 끝났다. 우리 집으로 비가 들이닥치는 일은 없어졌고, 옥상도 깨끗해졌다. 가끔 옥상에 올라 깨끗해진 옥상을 보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집 옥상에는 푸릇푸릇 야채들이 열리고 있었다.


옥상 수리로 누수는 없어졌지만, 1층 할머니집의 음식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짜증 난다고 생각했던 그 냄새가 뭔지 모르게 익숙해져서 나는 꿈속에서도 그 맛을 상상했다. 어느 날은 할머니의 된장찌개 냄새가 왠지 엄마의 찌개와 비슷한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사를 가기 전 정화조 요금을 정산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았다. 청소하는 할머니를 뵈면 전달드리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를 뵙기 어려웠기에 1층의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는 자신들도 다리가 좋지 않아 이사를 간다고 하며, 나의 이사를 아쉬워했다. 많은 접점은 없었지만 뭔가 같은 빌라에 살면서 나도 모르게 할머니를 많이 의지했었던 거 같다. 다음날, 나는 할머니의 집 문을 다시 두드렸다. 아직 품 안의 붕어빵은 따끈했다. 그 붕어빵을 할머니에게 전달하며 감사했었다는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후, 오피스텔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더 이상 배관에서 음식 냄새가 넘어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아랫집인지 윗집인지 모를 곳에서 배관을 타고 구수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웅성웅성 들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공동주택에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일도 많지만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또한 어떻게 보면 참 재미있는 일 같이 이제는 느껴진다. 왠지 이제 배관에서 아무 냄새도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서운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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