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24
집을 채워 간다는 건 내게 재미있는 일이었다. 후암동 월세집은 가전이며 가구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덩그러니 비워져 있는 집을 보며 처음에는 오히려 채워가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가전가구를 사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뭔가 내 손으로 하나씩 채워 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산에 맞추다 보니 가구는 거의 조립식이었고, 집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웬만한 가구는 다 조립할 수 있는 조립의 고수가 되었다. 가전은 가성비를 따지다 보니 브랜드도 색도 다 따로 놀았지만, 내 힘으로 가전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찼다.
그때까지는 매일같이 오는 택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나만의 공간에 나만의 물건을 채울 수 있어 행복했다.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려 했지만, 신기하게도 살다 보니 그 집 크기에 맞게 물건이 늘어났다. 식탁에 앉아 있으면 선반이 더 필요할 거 같았고, 처음에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침대도 어느새 꼭 필요한 물품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고향으로 내려간 뒤에도 이상하게 물건이 줄어들긴커녕 늘어났다. 그래서 그 집을 나설 때에는 이삿짐 트럭이 두대나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도 나름 새집에 맞춰 줄이고 줄였는데도 한대의 차로는 도저히 운반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후암동 집에서 3분 거리에 있었던 해방촌 집 또한 옵션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모든 것을 채워야 했지만, 이전에 살던 후암동 집 또한 같은 조건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도보로도 차로도 후암동 집과 3분 걸리는 이상한 거리감의 집으로 이사를 준비하며, 후암동 집의 모든 것을 가져가야 한다 생각하니 아득했다. 후암동 집은 그래도 어떻게든 집 앞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었지만, 해방촌 집은 급경사의 막다른 골목에 위치해 있어 주차가 어려울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3층 반을 엘베없이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결단한 것이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사람을 쓰자였다. 그럼에도 이삿날은 힘들었다. 1인 자취방 이사에 차량 두대에 3명의 사람이 왔지만, 집을 본 이삿짐센터에서는 아연질색을 했다. 당일 급하게 사다리차를 부르게 되었고, 사다리차는 해방촌의 좁고 가파른 경사길을 뺐다 넣었다를 반복하다 겨우 집 앞까지 올 수 있었다. 사다리차 하나에 이사는 정말 수월하게 흘러갔다. 사다리차가 네댓 번 올라갔다 하자 트럭 두대의 짐은 금세 사라졌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이 집에 살면서 큰 물건이 올라올 때는 돈을 더 써서도 어떻게든 사다리차를 부르자는 결심이 섰다. 하지만 그 후로 사다리차가 그 골목에 다시 들어온 적은 없었다.
노후화된 세탁기를 교체할 때도, 에어컨을 구입했을 때도 사다리차는 골목 앞까지 왔다가 결국 돌아갔다. 해방촌의 경사를 이겨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이사 들어오던 그날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돈은 조금 더 들었지만, 급하게 부른 사다리차가 빨리 왔고, 어떻게든 이 어려운 골목까지 들어와서 빠르게 이사를 끝날 수 있었다. 해방촌에 살다 보니 그런 일들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불안했다. 언젠가 이 집을 떠나야 할 날이 올 텐데, 이삿날과 같은 행운이 나에게 계속 따라 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면 그 불안은 더 가중되었다. 집 안에 가구와 가전을 보면 저것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나가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삿날 이후로 큰 짐을 사지 않게 되었다. 소비적인 상황으로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공간에 있으면 계속 불안했다. 다 버릴 수 있는 물건들이고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다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한번 가진 생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냉장고가 식탁이 소파가 티브이가 나를 여기에 묶어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주인과의 불화가 생길수록 그 생각은 더 심해졌다. 이 집이 내가 계속 살 수 없는 곳임을 인지하면서 더 그런 거 같았다. 이 집이 나를 붙잡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없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나는 갇혀 있었다. 어느 날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떠나버리고 싶다가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그때의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 생각을 그나마 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 집은 나가려 준비할 때부터였다. 나는 일부러 풀옵션인 오피스텔을 구했고, 나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져갈 것과 버릴 것, 당근에 내놓을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냉장고도 에어컨도 세탁기도 전자레인지도 식탁도 책상도 빠져가는 집을 보며 뭔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도 뭔가 휑했다. 그만큼 내가 그것들에 애착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비싼 물건도 아니었고, 수제품도 아닌 기성품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것들에게 내가 묻어있는 거 같았다. 한순간에 다 빠져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사 당일, 마지막까지 나눔 해도 나가지 않았던 패브릭 소파를 1층으로 내려놓았다. 혼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파 하나 내리는데 발을 헛디뎌 계단을 구를 뻔했다. 이 집에 걸맞지 않은 걸 내가 지금까지 안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마음에 드는 나의 소파였는데, 1층 쓰레기장에 있는 소파를 보니 그냥 솜과 나무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모든 짐이 다 빠진 해방촌 집을 둘러봤다. 나도 모르게 울컥임이 올라왔다. 아직까지 따뜻한 기운이 그곳에 남아있는 거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울컥임이 더 심해졌다. 이 공간의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지면 뭔가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 집과 물건들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잡고 있었다. 4년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것들은 그곳에서 나와 함께했다. 그래서일까 뭔가 지나친 생각이라 스스로 알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함께 해 줬던 모든 것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