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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ODA Oct 08. 2024

네 번째 손님 1 - 실패를 부르는 남자


남자는 양복과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입었는지 그의 구부정한 체형대로 형태는 변해 있고 옷감의 표면은 닳아 빛이 바랜 은색 양복. 옷도 옷이었지만 얼마나 신고 다녔는지 얇아진 구두 가죽에 발가락이 도드라져 보이는 상태가 그의 지금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가 딱히 상혁의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선 해 보이고 현명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지금의 옷차림은 왠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과 이런 유의 불협화음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불쾌하다는 느낌이 든 것뿐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마침 그가 커피주문을 하려 상혁 쪽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여러 해를 잊고 싶어 했던 그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이 남자에게 상혁은 오픈까지 15분 남짓 남았다는 걸 퉁명스레 말하고 있었다. 


이내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떡이더니 그는 제일 뒤편 자리에 앉아 열려있는 문으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카페 직원의 불친절함 따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눈빛이었다.


“ 이제 주문 가능하세요.” 

“.. 아메리카노 한 잔, 따뜻한 걸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여기가 인생을 읽어준다는 복덕방이라고 해서 왔는데.. 얼마 전에 왔던 사람 소개로 오게 됐습니다” 

 

데스크로 와서 간단히 커피를 주문한 남자는 잠시 주춤하더니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상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얼마 전에 왔던? 내리는 커피의 고소한 향이 퍼지는 사이 상혁의 머릿속엔 지난번 집 매매 해준 세 번째 손님이 떠올랐다. 그 손님이랑 아는 사이인가.


“ 오늘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으신지 사장님께 여쭤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원래 예약을 받고 진행하거든요”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닌데 상혁은 자신이 상대방을 퉁명스럽고 깐깐하게 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왠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근육의 긴장 같은 것이라고 할까.


… 


“ 제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여기 다녀오고부터 사는 게 좀 달라졌다고 해서.. 사업을 할 때 다들 복이다 운이다 주변에서 이런 것들을 신경 써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싫었습니다. 그저 제 노력으로 일궈냈으면 하는 생각이 컸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지금이 돼서야. 더 잃을 게 없는 한계까지 오고 나서야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하더군요. 뭐.. 이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지요. 


마침 하던 사업장도 정리할 겸 부동산도 내놓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제가 하는 일마다 왜 그랬던 건지.. 마지막으로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남자가 주인장과 이야기를 시작한 후로 3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원래 상혁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연은 라디오 사연 소개 코너에서 들리듯 무심히 듣곤 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이야기. 고구마도 이런 고구마가 없었다.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의 전형이다. 이렇게 운이 없을 수도 있는 거구나. 자신은 그래도 이 남자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만큼의 인생 이야기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려는 참이었다.



“ 사장님. 사업이나 운도 잠재의식이랑 관계가 있어요?” 

“ 글쎄. 어떨 것 같아?” 

“ 음.. 그거야 말로 정말 별개 아닐까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노력이 먼저 아닐..”


상혁은 자신이 말하고도 흠칫 놀라 말을 멈췄다. 자신도 노력을 그렇게나 오래 했는데 결국 취준생으로 와있는 곳은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있기는 있나.

 

“ 흠.. 아무래도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는데” 

“ 직접이요?” 


처음부터 상혁은 그 남자 손님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이상하리만치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 남자 때문에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올라와서였다. 답답함을 너머 마치 빨대 하나로 간신히 숨 쉬고 있는 그런 느낌. 그런데 이번엔 그런 사람의 잠재의식까지 가 봐야 한다니. 상혁은 더 내키지 않았다. 


“ 이건 현실적인 사업능력의 문제로 보여요. 감정적인 무언가나 내면의 마음설정과 전혀 관계없을 것 같다고요.” 


“ 으흠.. 우리 직원님이 오늘 좀 이상한데..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돼. 다만 다녀온다면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게 될 거야. 그건 내가 보장하지.” 


뭔가 잘못 먹은 듯한 표정을 한 상혁을 보자 이유는 오히려 단호하게 답을 내린 것 같았다.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상혁은 목덜미 부분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유가 그런 류의 미소를 지을 때는 무언가 중요한 게 있을 때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정은 흰색, 벽의 중간부터는 회색인 어떤 사무실이었다. 실랑이 끝에 결국 방화복을 입고 온 둘은 마치 옛날 영화 속에서 우주복을 입고 걸어 들어온 듯 낯선 느낌으로 서 있었다. 여기저기 직원들이 보이고 아침에 찾아온 그 손님과 직원들의 대화가 오갔다. 


“ 사장님. 환율이 치솟았어요” 

“ 저희 회사가 은행을 통해 가입했던 키코가 오히려 부도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그땐 설명도 안 해줬는데. 이러다 흑자 부도나겠어요. 어쩌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정확히 금융 쪽 지식이나 용어를 잘 아는 게 아니었지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은행에서 분명히 안전하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업이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 부도가 나야 하는 게 말이 되나..’ 


그 손님이 독백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상혁의 머릿속에서도 동시에 들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은행권과 엮여 잘못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시대는 좀 옛날처럼 보이는데 달력엔 1997년 도라는 표시가 된 걸로 봐서 매번 경제위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왔던 그때 상황이리라.


‘ 나는 역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놈이구나’ 


독백인 듯 아닌 듯 무언가 검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남자의 등에서 꿈틀거리며 흐릿하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더 이상은 에너지가 없는 듯 사라졌다. 


글을 읽자마자 주인장이 주머니에서 실타래 작은 실타래 두 개를 꺼내더니 사무실 한쪽으로 나와있던 전선들 중에 실타래의 한쪽을 묶으면서 속삭였다. 


“ 파란색으로 보이는 전선이 있을 거야. 사실은 전선이 아니라 분노와 후회 라고 하는 감정이 흐를 때 우리 눈에만 보이는 건데 그 전선에 실타래 실의 한쪽을 묶고 다른 한쪽은 주머니에 넣어서 돌아다니면 돼. 그럼 길을 잃지 않게 되지. 절대로 풀리지 않게 매듭을 지어야 해. 


손님에 따라서 저 선이 나타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어. 안 나타나면 그냥 다녀도 돼. 돌아가는 계단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만약 나타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매듭으로 실을 묶어둬야 돼. 안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장면과 장소의 전환이 빨리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길을 잃게 돼. 앞으로도 그건 절대 잊지 말아.” 


직원들이 허겁지겁 뛰어올 땐 마치 자기를 알아보고 뛰어오는 건가 짐짓 놀래서 주춤거렸으니까. 상혁은 이러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짐짓 놀래서 이 남자의 무의식에서 길을 잃고 싶진 않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실을 묶었다.


“ 분노라면 파란색이 아니라 붉은색 선을 찾아야 하는 것 같은데.. 좀 이상해요” 


상혁이 바닥의 여러 가지 선들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분노장르에 속하는 감정이 매번 같은 색은 아니라는 걸 주의해야 해. 붉은색은 폭발 이후라면 파란색은 그것을 차갑게 누르고 있거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때의 색이거든.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을 때 가장 본능적으로 먼저 올라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가끔은 이 분노가 무력감과 장애로 회색 혹은 푸른색으로 종종 변해 있어서 찾지 못할 때도 있으니 재현되는 상황에 따라서 분노가 잘 보이길 기다렸다가 그 끈을 묶어놓고 감정을 따라가야 해.” 


상혁은 하고 많은 감정 중에 왜 하필 분노냐고 묻고 싶었지만 가장 본능적이라는 말에 수긍이 되어 고개를 그 떡이고 있었다. 실을 묶자마자 자신들이 있던 장면은 변환되었다. 회색으로 둘러싸인 듯한 사무실에서 이젠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많은 식당 같았다. 


아까의 장면보다 시간상 더 오래전으로 고기와 술을 파는 투박한 식당이었다. 저녁시간 사람들이 몰려 왁자지껄하게 소란스러운 와 중 구석의 남녀 두 사람만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라고요. ” 

“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사랑해서 더 힘들어.” 

“ 매번 왜 이래요. 다른 걸 보면 되는데..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나는 당신 믿어요.”

“ 내가.. 그래.. 매번 이거다 싶을 때가 있었지만 결국 하나같이 사라졌어. 너한테 만큼은 그런 모습 보이는 것도 실망하게 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 


“ 어떤 모습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면 된다고요.” 


비슷한 대화가 이어지더니 결국 여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머리를 아래도 숙이고 한참을 흐느끼더니 그녀는 결국 일어나 나가버렸다. 상혁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의 젊은 그는 그녀를 잡지 않고 술병을 벌컥벌컥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자 독백처럼 들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 내가 그런 놈이지.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을 거야.. 차라리 더 좋은 놈에게 보내는 게 나아.’


그가 하는 독백과 함께 몸에서 ‘ 나는 가질 수 있는 게 없다’라는 글귀가 피어올랐다. 


“ 저 아지랑이 같은 글귀 저에게만 보이는 건 아니죠? 저 글자들.. 정체가 뭐예요?” 


독백과 달리 좀 더 정제되어 있는 느낌의 글귀는 상혁이 보기엔 저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모양 자체도 아지랑이처럼 길게 피어올라 사라졌는데 특정 사건과 관련된 저주들이 임무를 마치면 사라지는 게 분명해 보였다. 


“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 이후로 여러 가지 그 남자의 기억들과 글귀들이 상혁과 주인장 앞을 지나갔다. 


신기하게도 기억들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매번 다른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 무언가를 잃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많은 노력 끝에 매번 가질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가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매 장면 속에서 그는 노력하는 모습이지만 번번이 가질 수 없는 좌절들. 그리고 그 이후엔 되는 게 없어 보였다. 자포자기 등의 표현만이 피어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실로 묶어둔 파란색 전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일정 부분에서 멈춰 있는 듯 더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둘은 7층의 같은 곳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상혁은 이제 이런 반복적인 패턴을 그만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타인의 실패한 역사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상혁에게 떠오른 건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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