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러 한 군데 평생 살아요. 살아보고 더 편한 곳으로 가면 되는데.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앞을 본다. 수많은 집 중에 내 것이 하나 없을까? 6년 전 집을 팔고 우리 가족은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한 곳에 계속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도 6년째 거의 전무하다(아이들은 동네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동네 친구가 하나둘 생기기는 했다). 그래서 내 집에 살며 안정을 찾고 싶었다. 내 집을 맘대로 꾸미고, 동네 사람들과 얼굴 트고 지내고 아이들도 아파트 친구가 생겨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하다가 집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갭으로 집을 두채 가지고 있고 현재 전세를 살고 있다. 내년에는 자신의 집 중 하나로 이사 갈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물어봤다.
" 좋으시겠어요. 내년에 내 집으로 이사 갈 수 있어서."
" 별로 좋진 않아요. 이건 분양받은 건데 별로 오르지도 않은 데다가 내 집에 살면 거기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갑갑하긴 해요."
내 집이 갑갑하다니? 이해되지 않는다. 전셋집에 살면 물건 하나 벽지 티끌처럼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아이들이 낙서를 하거나 얼룩이 튈 때마다 나는 예민해졌다. 게다가 이미 앞서 전세를 산 사람이 너무나 더럽게 썼기 때문에 아무리 닦아도 태가 나지 않는 집이라 짜증도 난다. 내 집이면 이렇게 했겠냐는 생각과 함께...
" 자기 집에 살면 좋잖아요. 집주인 눈치 안 봐도 되고, 이사 안 다녀도 되고."
" 그런 면에서 좋긴 하지만 살다가 집이나 동네가 지겨우면 새로운 동네에 살아보고 하는 것도 좋은데, 내년에 이사 가면 다른 곳을 가지 못할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 원래 갖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살 생각은 없으셨어요?"
" 네. 뭐 하러 한 군데 평생 살아요. 여기저기 살아보고 더 편한 곳에서 전세 살면 되는데."
" 살던 곳이 익숙하고 편하지 않아요? 저는 다른 곳에서 살아볼까 라는 마음이 생겨도 옛날에 살던 곳이 계속 눈에 밟혀요."
" 저는 학교 다닐 때 이사를 좀 다녔는데 새로운 동네에 살아보면 좋더라고요. 동네마다 다른 점도 알 수 있고 재미있잖아요."
" 주로 어떻게 집을 고르세요?"
" 집사람 근무지 근처예요. 그래야 서로 편해요. 아이도 그 근처에서 학교 다니니까 가깝고."
" 아이도 있는데 학군지에 집을 사는 건 어때요? "
"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모두 따지자면 생각할 것도 너무 많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잖아요."
"구축, 신축 그런 건 안 따지세요? 요즘 집 잘 나오는데."
"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써요. 집사람 근무지 근처에 괜찮은 곳 있으면 그냥 이사 가서 살았어요.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드는 다른 아파트 가서 살면 되니까."
나는 모든 사람이 내 집에서 살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스에 수백 대 일의 청약으로 분양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아파트 거래량이 높아질 때 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또한 내 지인들 중 과거 전세 살던 사람들은 현재 대부분 자기 집 하나는 갖고 있다. 친척들도 모두 자기 집에 산다. 그래서 전세 사는 사람은 결국 내 집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전세를 사는 사람의 일부는 집을 살 생각이 없거나 자기 집이 있어도 들어가 살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재테크가 아니라 새로운 동네를 경험하는 즐거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이사를 다닌 적이 없다. 아버지는 본인이 태어난 곳에서 70년 넘게 살고 계시고 나도 대학 가기 전까지 한 집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지금까지 소방 도로가 나면서 몇몇 주민이 이사를 가긴 했지만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도 늘 같다. 앞 집에는 경찰, 우리 부모님과 사이 나쁜 옆 집, 다단계 하다가 망했던 건너 집. 시간이 지나 집은 새로 지었지만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대로다. 내가 상식이라 생각했던 삶의 모습은 그저 익숙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집은 꼭 필요한가? 사람마다 다르다. 집이 있어야 안정적인 삶인가? 안정적인 생활은 집과 같은 말이 아니다. 한 곳에 정착하는 곳이 안정이라면 집이 있는 것이 좋고, 집 없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이라면 무조건 집을 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집이 있다 한들 지분의 대부분이 은행 몫이라면 생활이 안정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저 많은 집들을 바라본다. 저 안에는 나처럼 내 집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도 있고, 동료처럼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경험하며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자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언제부턴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 굳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세의 재미.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 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