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이 나를 소유했던 시간에 대해
십여 년 전 시어머니께서 저에게 50만 원을 주셨습니다. 이 돈으로 가죽재킷을 사 입으라고 하시더군요. 시어머니는 멋쟁이신데 평소 면바지에 면남방을 주로 입는 저를 챙겨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얼떨떨하긴 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남편과 함께 백화점엘 갔습니다. 남편과 캐주얼 매장을 쭈욱 둘러봤지만 마음에 드는 재킷은 없었습니다. 몇 군데 돌아본 끝에 여성 정장 코너에서 제 마음에 드는 재킷을 찾았습니다. 어두운 갈색톤에 겨드랑이 아래로 신축성 좋은 옷감이 덧대어져 있는 재킷이었어요. 하지만 남편은 반대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돈에 비해 저렴하고 100% 가죽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요. 다른 매장에서 마침내 남편의 마음에 드는 재킷을 찾았습니다. 보들보들한 질감의 연한 갈색 재킷이었습니다. 세일 중이어서 할인된 가격은 어머니가 주신 금액과 거의 비슷했어요. 저는 좀 부담스러웠지만 매장 매니저님과 남편의 강력한 추천으로 처음 가죽재킷을 입게 되었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옷을 건네받을 때 매장 매니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건 색이 연해서 청바지와 닿으면 이염이 되고, 물에 닿으면 얼룩이 남을 수 있어요. 가방 끈 마찰에도 약하니 가능하면 토트백을 쓰세요."
별생각 없이 "네."하고 대답하며 매장을 나섰습니다. 어머니께는 좋은 가죽 재킷을 한벌 샀다고 감사 전화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가죽 재킷에 진한 청바지를 입었는데, 청바지와 가죽재킷이 닿는 부분의 색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재킷을 입고 출근을 했는데, 퇴근할 무렵 비가 와서 정말 난감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가랑비정도는 그냥 맞으면서 퇴근했을 텐데 가죽재킷이 비를 맞으면 상할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백팩이나 크로스백을 주로 썼는데 가죽 재킷을 입는 날은 가방을 손에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죽재킷을 입을 때 이렇게 신경 쓸게 많구나 하고요. 받쳐 입는 바지도, 소지품을 넣을 가방도, 그날의 날씨도 신경 써야 했거든요. 선물 받은 명품 가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명품 가방을 드는 날이면 정장이라도 입어야 할 것 같아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비가 와도 나보다 가방을 보호해야 하고, 외출을 할 때는 맘 편히 걸어 놓지도, 다른 곳에 내려놓기도 어려웠습니다. 가방도 내가 드는 것이 아니라 가방이 나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둘 다 제가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이사를 앞두고 집을 정리하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가죽재킷과 명품가방을 보았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아 마침 대학에 입학하는 조카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새것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좋은 제품이니 필요할 때 쓰라고요.
그리고 지금 저에게는 명품가방도 가죽재킷도 없습니다. 가방은 편하게 들거나 멜 수 있고, 비가 와도 걱정 없으며 아무 데나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을 고릅니다. 옷은 비를 맞아도 걱정 없고 아무 가방에나 어울리는 것으로 입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나에게 맞는 것은 비싸고 예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이라는 걸요. 가방도 옷도 아무리 비싸고 좋아도 내가 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돌아보면 처음 제가 고른 그 실용적인 재킷을 샀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 시행착오 덕분에 저는 물건에 맞추어 살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출발점에는 시어머니의 선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